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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웨이드 Aug 31. 2024

3. 웨이드와 웨이드

달밤의 영화관으로 도피한 '술품' 덩어리

 **이 글은 영화 <데드풀 2>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닉네임의 웨이드는, 두 가지 캐릭터를 의미한다.

하나는 '엘리멘탈'의 남자 주인공인 물 원소 웨이드 리플, 다른 하나는 '데드풀'의 웨이드 윌슨.



엘리멘탈은 남자친구와 함께 봤다.

앰버와 웨이드, 우리는  그 영화를 보며 서로 그들이 우리와 똑 닮았다고 생각했다.

욱하는 면이 있지만 할 말은 하고 사는, 겁도 많고 정도 많은데 재능까지 많아버리는 앰버가 남친,

감성적이라 공감을 잘하고 다정하며 침착하지만 눈물이  많은 웨이드가 나였다.

둘은 처음에 생각 차이로 많이 부딪히다가 서로의 온도를 맞추는 법을 터득해 안정적인 사랑을 하게 된다.


 여러 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던 우리는, 재회할 때마다 무슨 포켓몬 진화하듯이 성장했다. 그의 욱하는 면은 조금씩 차분해졌고, 나는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가 힘들어하는 점을 줄이려고 하다 보니 서로를 조금씩 닮아갔다.

나는 앰버에게서 감정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남친은 웨이드에게서 마음을 헤아리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영화에선 웨이드를 잠시 잃었던 앰버가 있지만 현실은 앰버를 영영 잃어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된 눈물바다 속의 웨이드가 있다.

차라리 증발되어 함께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어땠을까 매일 허우적대는 웨이드.


엘리멘탈 OST 전주만 들어도, 포스터나 스틸컷만 봐도 마음이 '쿵'하고 아프지만 나에게는 더욱 보석같이 귀한 영화가 되었다.


-


장례가 끝나고 난 뒤, 술을 진탕 마시고 필름이 끊겨 잠을 자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고 얼마간을 지내니, 술을 많이 마셔도 잠이 안 왔다. 안대를 끼고 수면테이프를 붙여도, 수면 ASMR도 소용이 없었다. 약국에서 파는 수면유도제도 듣지 않았고, 신경정신과에 가는 건 무서웠기 때문에 그냥 잠이 올 때까지 안 자기로 했다.


 울다가 멍 때리고 술 먹고 밤새는 걸 반복하는 중에, 대학생 때 해외봉사단을 같이 했던 지인에게 종종 연락이 왔다.

영화 정보에 빠삭하고, 꿰뚫고 있는 영화가 많은 그 오빠는 잠 못 드는 밤마다 나에게 X맨 시리즈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각자 같은 영화를 틀어 싱크를 맞추고, 보이스톡으로 통화를 하며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설명해 주는 방식으로. 


 시리즈가 많아 어떤 날은 한 편, 어떤 날은 두 편. 보다가 졸리면 자고, 자다가 느닷없이 깨서 보고. 거의 매일을 그랬는데도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새벽에 잠을 못 자고 있으면 영화나 보자며 메시지가 왔다.

그러다가 문득, 그 패턴에 과하게 의지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사별한 사람들은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나는 그 도움들에 익숙해질 걱정이 가득했다.


주변에서 내 안부를 묻고, 영양제와 책을 선물해 주고, 집 앞에 찾아와 산책을 해줬다. 너무 고마웠지만 고마운 만큼 겁이 났다.


 받는 만큼 빨리 회복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걱정을 하면서 사실 속으로는 빨리 회복하는 게 싫고, 슬펐다. 내 슬픔이 줄어든다는 게 그를 배신하는 것 같기도 하고, 회복하는 날 보며 서운해하는 건 아닐지 죄스럽고 미안했다.

'아.. 조금만 덜 슬프면 살만할 것 같은데..', '자고 일어나면 시간이 훅 가있었으면 좋겠다' 같은 마음이 들 때, 나 자신이 슬픔과 어둠의 지옥 속에서 혼자만 쏙 빠져나오려고 하는 얌체같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모든 걸 밀어내고 슬픔에 절여져 있기만 하기에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힘들기도 하고, 마음 써주는 주변 지인들과 가족에게 너무 미안했다. 


이 즈음, 지인들에게 오는 연락에도 답장을 드문드문하기 시작했다. 뭘 먹었는지 끼니마다 물어보는 친구, 컨디션을 체크해 주는 친구, 이제 회사 복귀는 했냐고 물어오는 동생, 잠은 잘 자고 있냐고 주기적으로 물어보는 회사 동료언니.

항상 너무 고맙고 반가웠지만, 냉큼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인생이 바닥을 치는 감정이 들 때 누구에게 그걸 오랜 기간 동안 표현하고 산 역사가 없기 때문에 중간에 '앗차!' 하고 밸브를 잠가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영화 기행을 잠시 멈췄다. 때마침 할 일이 생기기도 했었지만, 이유가 오로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영화를 보자는 제안을 사양하며 마음이 미안하고 무겁기도 했다. 좋은 마음으로 챙겨주는 걸 차단하는 것 같아서.


그러고 나서 며칠을 보낸 뒤, 오랜만에 데드풀 2를 보기로 했다. 이미 본 영화라 내용을 알고 있긴 했지만, 바네사(데드풀의 연인)가 죽을 때 마음이 다시 한번 찌릿했다.

바네사가 죽고 난 뒤 영화 중후반까지 웨이드는 내내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고, 그녀를 따라 죽을 생각으로 가득 차있다. 이후 결국엔 바네사가 살아나는 해피엔딩으로 끝나 나와는 조금 다르지만, 총에 맞아 떠나버린 연인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던 수많은 장면들이 너무 뼈저리게 공감이 가서  명치 가운데가 아려오는 느낌이었다. 그리움의 대사 한 줄 한 줄이 마음을 후벼 팠다. 있을 때 잘할걸.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상태로 영화를 꾸역꾸역 봤더니 얼굴은 따가웠지만 실컷 울어서 그런지 마음은 조금 차분해졌다.


 공교롭게도 그 두 웨이드들은 그가 떠나기 전에도 내가 사랑했던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얘네들을 크게 애정했다지만, 이런 식으로 그들에게 사무치게 공감하게 되다니 황당하고도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밤중의 영화 감상 덕에 술독에 머리끝까지 꼬르륵했던 슬픔덩어리가 반신욕 상태로 빠져나와 제법 사람다운 형태로 살아내고 있음에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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