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여담(飮食餘談) 7 - 멍게의 위로
그곳은 부산의 영도, 일찍이 현인이 '굳세어라 금순아'에서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승달만 외로이 떴다고 노래했던 바로 그 영도였다. 부산하면 떠오르는 해운대도, 광안리도, 자갈치시장도, 국제시장도 아닌 영도에 간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영도에서는 번잡스럽지 않게 각종 해물을 안주 삼아 호젓한 부산을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만 있었다.
한적한 바다를 찾아 부산역에서 508번 버스를 타고 초승달만 외로이 뜨기 한참 전인 12시께 영도다리를 건너 도착한 곳은 부산남고등학교 인근의 중리 해녀촌. 바닷가에서 해녀 할머니들이 해물을 바로 손질해 파는 난전이 서는 곳이다. 바닷바람 맞으며 넘실대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소주가 몇 병이라도 들어갈 것만 같은 이곳에선 싱싱한 해삼, 멍게, 뿔소라, 성게 등을 먹을 수 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그야말로 바다 내음 흠뻑 밴 해변의 안주들이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붉게 빛나는 멍게다. 본디 이름은 우렁쉥이, 멍게는 방언이다. 하지만 멍게라고 더 자주 불려 둘 다 표준어가 됐다. 딱 이맘때인 5월이 제철이니 저 멍게만은 꼭 주문해야지 생각하곤 침 삼키며 걷다 보니 입구부터 할머니들의 호객 경쟁이 만만치 않다. 서로 잘해주겠다며, 끝내주는 자리가 있다고 잡아끄는 할머니들에게 가격만 묻고는 손사래를 치면 '이런 우렁쉥이 같은' 비슷한 말로 꾸지람을 들을 것만 같았다. 얼른 자리를 잡을 수밖에.
멍게와 단짝인 해삼 섞어 한 접시를 주문하니 해녀 할머니는 은근히 성게알을 추가할 것을 권했다. 여기에선 TV에서 소개된 후 성게알에 김밥을 곁들여 먹는 것이 필수 코스처럼 된 모양이었다. 둘러보니 너도나도 김밥에 성게알은 기본 메뉴인 양 다들 하나씩은 앞에 놓고 있었다. 좀 많다 싶었지만 괜한 흥정이 모처럼 바닷바람 쐬는 이 기분을 망칠까 저어됐고 푸짐하게 차려놓고 여유롭게 바다를 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 짐짓 호기롭게 성게알도 추가했다.
바다가 주는 느낌은 삽상했고 맛의 절반은 이 풍광과 분위기가 책임지리라 여겼지만 웬걸. 비싼 성게알, 해삼 다 제치고 안주로서 발군의 기량을 보여 준 것은 제철 멍게였다. 그 향긋함과 시원함은 그저 소주를 불렀고 이러다 무사히 영도다리를 다시 건널 수 있을까 우려마저 들었다. 하지만 낮술에 불콰하게 물든 얼굴이 멍게 색이 되고 그렇게 멍게 모양을 하고 멍게를 씹다 보면 금세 "괜찮아, 여기는 바다고 나에게는 멍게가 있으니깐"하고 자족하게 됐다. 멍게와 함께라면 객쩍은 주정도 다 말이 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멍게를 술안주로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멍게의 고장 통영에선 밥에 넣어 비벼 먹는다. 초고추장을 넣기도 하지만 신선한 채소에 참기름만 두르고 쓱쓱 비비면 술 한 잔을 불렀던 그 멍게 향이 밥알에 배어 입맛을 돋운다. 한 숟가락 가득 떠 넣으면 그 한입에 봄 바다의 맛이 밀려온다.
소설가 천운영은 멍게를 한입 넣으면 새곰한 맛이 콧구멍부터 목젖까지 아련하게 번져오고, 멍게를 삼킨 다음 물을 마시면 싸하고 신맛이 가시면서 단맛만 남는다고 썼다. 그러면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멍게를 먹고 싶으면 아주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난 멍게처럼 발그레 물든 얼굴로 아주 잘 살고 싶은 맛에 대해 생각했다.
어머니는 언젠가 오래전 동네 어귀 트럭에서 팔던 멍게를 사서 혼자 집에서 허겁지겁 먹었던 기억을 전하며 그 맛과 향이 수십 년이 지난 아직도 선연하게 남아 있다고 했다. 육아에 지쳤을 그 시절 멍게가 고단한 삶에 전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성게알처럼 호사스럽지는 않지만 풍성한 향을 입안 가득 채우며 멍게는 넌지시 위로를 건네지 않았을까. 괜찮아, 영도다리 난간 위에 외로이 뜬 초승달만 바라볼지라도, 굳세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