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여담(飮食餘談) 8 - 물회의 주인공
아버지는 이곳 사람들이 먹는 밥을 먹자고 했다. 벌써 20여 년도 전, 제주도의 어느 해변이었다. 물어 찾아간 곳은 해수욕장과는 좀 떨어진 허름한 식당, 뭍사람이라고는 우리 밖에 없는 것 같았고 그들은 모두 물회를 먹고 있었다. 회는 비싼 음식인 줄로만 알았는데 각종 채소와 함께 고추장·된장 양념이 풀린 물 안에 든 회를 숟가락으로 푹푹 떠먹고 있었다. 우리도 물회를 주문했고 어린 나는 처음 접하는 이것이 제주의 맛이구나 싶어 괜히 감격했다. 그때 물회의 재료가 한치였는지 자리돔이었는지 뿔소라였는지 지금 기억나지 않지만 그 음식을 둘러싼 정서는 아직 남아 있다. 아, 이 한 그릇은 여기 터전을 두고 사는 이들의 끼니, 어부의 밥이구나. 나는 얼음을 동동 띄운 물회를 훌훌 넘기며 이제 현지인의 음식도 잘 먹으니 제법 어른이 된 것처럼 느꼈었는지도 모른다.
물회의 시작은 이런 내 첫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거친 파도와 싸우면서 녹초가 된 어부들은 배 위에서 큰 그릇에 펄떡거리는 흰 살 생선을 썰어 넣고 신김치, 채소를 더해 고추장을 듬뿍 푼 후 시원한 물을 부었다. 이것을 숟가락으로 퍼먹고 사발째 후루룩 마셨다. 단출했지만 갈증을 풀고 피로에 찌든 몸을 추스르기에는 최고였을 것이다.
나에겐 물회라고 하면 으레 제주도가 떠오르지만 식당에서 처음 판 곳은 경북 포항이다. 1961년 포항 덕산동에서 허복수 할머니가 물회를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선원이었던 남편에게서 물회를 배웠다고 알려져 있다. 이 지역에서 물회는 '술국'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는데 술로 거친 뱃일을 견디던 시절 물회를 해장용으로 많이 먹었기 때문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물회는 채소가 많이 들어가 수분을 보충하는데 좋고 시원해서 속이 풀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물회의 재료는 다양하다. 비린내 나고 살이 무른 생선만 아니면 어떤 해산물이든지 물회로 먹을 수 있다. 가자미, 광어, 우럭, 도미 등 흰 살 생선이 어울리지만 해삼, 멍게, 오징어, 전복, 성게소 등을 물회에 넣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다. 속초, 양양 등 강원도에서는 오징어를 넣는다. 부산에서는 빨간 고기라고 불리는 눈볼대를 물회로 먹고, 거제에선 멸치로도 물회를 만든다. 제주도에서는 5~6월엔 특산물인 자리돔을 쓴다. 다소 억세지만 그 맛에 빠지면 1년 동안 기다리게 된다. 또 딱 이맘때부터 여름을 날 때까지는 제철인 한치 물회를 많이 먹는다.
양념은 고추장이나 된장에 식초, 다진 마늘, 깨, 참기름 등을 버무려 만든다. 동해안에서는 고추장을 많이 쓰고 제주도와 남해안에서는 된장도 사용한다. 전라남도 장흥은 된장을 풀어 맛을 낸 물회로 유명하다. 과일 등을 갈아 넣어 국물의 새콤달콤한 맛을 보충하는 곳도 있다. 먹는 방법도 조금씩 다른데 포항, 영덕 등 경북에서는 양념에 회와 채소를 비벼서 한참을 먹다 생수를 넣어 물회로 만들어 먹는다. 강원도의 물회는 국물을 미리 만들어 싱싱한 해산물에 붓는다.
지금 싱싱한 한치를 넣은 물회를 떠올리면 제주도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그 한 그릇이면 때 이른 6월의 땡볕도 견딜만할 텐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지금이 제철인 한치는 물회와 잘 어울리는 식감을 가지고 있다. 쫄깃하게 씹히며 물회 속에서도 온전히 제 존재를 뽐낸다. 국물을 마신 뒤에도 한치 특유의 고소한 맛은 살아 있다. 다른 재료의 맛도 죽이지 않는다. 양념이 다소 과하더라도 한치는 그저 어울릴 줄 안다. 물회 맛의 주인공을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고급 어종을 물회로 먹기는 아깝다. 성게소 등 화려한 재료들이 들어간 물회가 요사이 인기라고 하지만 재료 본연의 맛은 새콤한 양념의 자극적인 맛에 가려 주인공을 뺏기기 십상이다. 이것은 어릴 적 경험했던 물회 고유의 정서와도 멀다. 물회는 본디 값싼 재료 넣고 뚝딱 만들어 먹는 노동의 음식이었다. 기교 없이 막 썬 회에 각종 채소를 넣고 고된 뱃일에 지친 어부는 한 끼를 먹었다.
난 그 한 끼를 떠올리며 생각한다. 이 한 그릇의 맛을 풍성하게 만든 주인공은 누구일까. 돋보이지는 않을지라도, 갖은 양념과 어울리면서도 제 맛 굽히지 않는 한치처럼 묵묵히 일했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 하여 유하지만 강직하게, 한치처럼 사는 우린, 눈 휘둥그레지는 가격의 고급 회 맛은 잘 몰라도 물회 맛은 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