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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현 Jun 07. 2018

지금 제철 한치물회, 그 맛의 주인공

음식여담(飮食餘談) 8 - 물회의 주인공


아버지는 이곳 사람들이 먹는 밥을 먹자고 했다. 벌써 20여 년도 전, 제주도의 어느 해변이었다. 물어 찾아간 곳은  해수욕장과는 좀 떨어진 허름한 식당, 뭍사람이라고는 우리 밖에 없는 것 같았고 그들은 모두 물회를 먹고 있었다. 회는 비싼 음식인 줄로만 알았는데 각종 채소와 함께 고추장·된장 양념이 풀린 물 안에 든 회 숟가락으로 푹푹 떠먹고 있었다. 우리도 물회를 주문했고 어린 나는 처음 접하는 이것이 제주의 맛이구나 싶어 괜히 감격했다. 그때 물회의 재료가 한치였는지 자리돔이었는지 뿔소라였는지 지금 기억나지 않지만 그 음식을 둘러싼 정서는 아직 남아 있다. 아, 이 한 그릇은 여기 터전을 두고 사는 이들의 끼니, 어부의 밥이구나. 나는 얼음을 동동 띄운 물회를 훌훌 넘기며 이제 현지인의 음식도 잘 먹으니 제법 어른이 된 것처럼 느꼈었는지도 모른다.


물회의 시작은 이런 내 첫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거친 파도와 싸우면서 녹초가 된 어부들은 배 위에서 큰 그릇에 펄떡거리는 흰 살 생선을 썰어 넣고 신김치, 채소를 더해 고추장을 듬뿍 푼 후 시원한 물을 부었다. 이것을 숟가락으로 퍼먹고 사발째 후루룩 마셨다. 단출했지만 갈증을 풀고 피로에 찌든 몸을 추스르기에는 최고였을 것이다.


나에겐 물회라고 하면 으레 제주도가 떠오르지만 식당에서 처음 판 곳은 경북 포항이다. 1961년 포항 덕산동에서 허복수 할머니가 물회를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선원이었던 남편에게서 물회를 배웠다고 알려져 있다. 이 지역에서 물회는 '술국'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는데 술로 거친 뱃일을 견디던 시절 물회를 해장용으로 많이 먹었기 때문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물회는 채소가 이 들어가 수분을 보충하는데 좋고 시원해서 속이 풀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회의 재료는 다양하다. 비린내 나고 살이 무른 생선만 아니면 어떤 해산물이든지 물회로 먹을 수 있다. 가자미, 광어, 우럭, 도미 등 흰 살 생선이 어울리지만 해삼, 멍게, 오징어, 전복, 성게소 등을 물회에 넣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다. 속초, 양양 등 강원도에서는 오징어를 넣는다. 부산에서는 빨간 고기라고 불리는 눈볼대를 물회로 먹고, 거제에선 멸치로도 물회를 만든다. 제주도에서는 5~6월엔 특산물인 자리돔을 쓴다. 다소 억세지만 그 맛에 빠지면 1년 동안 기다리게 된다. 또 딱 이맘때부터 여름을 날 때까지는 제철인 한치 물회를 많이 먹는다.

  

양념은 고추장이나 된장에 식초, 다진 마늘, 깨, 참기름 등을 버무려 만든다. 동해안에서는 고추장을 많이 쓰고 제주도와 남해안에서는 된장도 사용한다. 전라남도 장흥은 된장을 풀어 맛을 낸 물회로 유명하다. 과일 등을 갈아 넣어 국물의 새콤달콤한 맛을 보충하는 곳도 있다. 먹는 방법도 조금씩 다른데 포항, 영덕 등 경북에서는 양념에 회와 채소를 비벼서 한참을 먹다 생수를 넣어 물회로 만들어 먹는다. 강원도 물회 국물을 미리 만들어 싱싱한 해산물에 붓는다.



지금 싱싱한 한치를 넣은 물회를 떠올리면 제주도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그 한 그릇이면 때 이른 6월의 땡볕도 견딜만할 텐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지금이 제철인 한치는 물회와 잘 어울리는 식감을 가지고 있다. 쫄깃하게 씹히며 물회 속에서도 온전히 제 존재를 뽐낸다. 국물을 마신 뒤에도 한치 특유의 고소한 맛은 살아 있다. 다른 재료의 맛도 죽이지 않는다. 양념이 다소 과하더라도 한치는 그저 어울릴 줄 안다. 물회 맛의 주인공을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고급 어종을 물회로 먹기는 아깝다. 성게소 등 화려한 재료들이 들어간 물회가 요사이 인기라고 하지만 재료 본연의 맛은 새콤한 양념의 자극적인 맛에 가려 주인공을 뺏기기 십상이다. 이것은 어릴 적 경험했던 물회 고유의 정서와도 멀다. 물회는 본디 값싼 재료 넣고 뚝딱 만들어 먹는 노동의 음식이었다. 기교 없이 막 썬 회에 각종 채소를 넣고 고된 뱃일에 지친 어부는 한 끼를 먹었다.

 

난 그 한 끼를 떠올리며 생각한다. 이 한 그릇의 맛을 풍성하게 만든 주인공은 누구일까. 돋보이지는 않을지라도, 갖은 양념과 어울리면서도 제 맛 굽히지 않 한치처럼 묵묵히 일했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 하여 유하지만 강직하게, 한치처럼 사는 우린, 눈 휘둥그레지는 가격의 고급 회 맛은 잘 몰라도 물회 맛은 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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