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알고 있으면 대비할 수 있을까?
성인이 되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다가 교수님에게 허락을 받지 않아도, 화장실에 갈 수 있었다. 나온 김에 캠퍼스를 바라보며, 온갖 폼은 다 잡으며 담배 한 대 피우고 강의실로 복귀해도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출석은 최우선 일과가 아니었고, 내 멋대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즉흥적으로 결강하고 풍류를 즐기곤 하였다. 언제나 땡땡이는 달콤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 후, 입대 전 망가뜨려 놓은 학점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지울 수 있는 과목들은 재수강하고, 계절학기 꼬박 듣고 메꾸면, 남은 2년 고생하면 4점대로 졸업할 수 있겠구나.’ 계산기를 신나게 두드리고 낸 결론과 함께 굳은 다짐도 생겨났다. 학점에만 매달린 복학 후 대학생활을 통해, 성인이 되면 나의 선택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선택과 책임. 만약 그 단순한 인과관계가 내가 어른이 되며 염두에 두어야 하는 원칙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얼마든지 합리적으로 선택하고, 책임지며 살아가면 될 일이다. 때론, 무리한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더라도, 사전에 인지하고 대응하며 책임질 수 있다면, 그러면 될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른으로 살아갈 날 들이 너무 설레고 자신감으로 넘쳤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나의 선택과 상관없이, 나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일들이 너무도 많았으며,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말단 실무자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30대를 거치며, 나를 둘러싼 대부분의 일들은 불가항력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대리/과장 시기에 누구나 겪는 직장인 사춘기를 겪으며 삶의 만족도는 바닥을 치고 말았다. 다행히, 결혼 후 아이들이 생기고 가정을 꾸리며 30대의 후반부는 롤러코스터처럼 지나갔다.
40대가 되고 나니 좀 더 정리된 삶을 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났다. 이전의 삶을 ‘살아 냈다’ 면 이제는 정말 내 삶을 ‘살아 보자’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40대를 지나가며, 나의 선택과 무관하게 겪을 수 있는 일들을 미리 준비하면, 감정이 질풍노도를 거쳐 나락까지 떨어졌던 30대의 전철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대략 아래의 일들 정도가 큰 사건이지 않을까?
1. 부모님의 임종과 장례식
부모님의 임종을 지킨다는 것은 상당이 어려운 일이다. 긴 시간 투병을 하신다던지, 결정적인 순간을 인지하고 가족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상황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대다수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부모님과 이별을 하게 된다. 장례식부터 막막하다. 상주로 치르는 첫 장례식이라면 더욱이 막막하다. 임종 순간, 장례식장을 선택해야 하고 부고 알림을 돌려야 한다. 영정사진도 급하게 준비해야 하고, 식장에 넣을 식사도 선택해야 한다. 화장을 결정했다면 즉시 화장터를 예약해야 하며, 매장을 결정했다면 장지와 긴히 연락해 발인일에 맞춰 모든 것을 조율해야 한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 부모님께 입혀드릴 수의도 선택해야 하고, 관도 직접 골라야 한다. 종교가 있다면, 즉시 연락하여 해당 종교의 장례절차를 확인해야 하며, 관련한 예식을 조율해야 한다. 위 언급한 일들이 아마 절반도 안 되는 리스트일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이 임종 후 1-2일 이내에 논의하고 확정해야만 한다. 상주는 상중에 슬퍼할 시간이 없다. 가족들과 ‘상 정성껏 잘 치러드리고, 다 끝나고 나서 슬퍼하자.’ 다짐해야만 한다. 그래야 발인일에 맞춰 원활하게 모든 장례가 진행될 수 있다. 가족들이 잘 분업하여 진행할 수 있다면, 굳이 상조서비스 가입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2. 관리자로의 승진
성과 위주의 평가를 도입하고 추진한다지만, 아직까지 한국의 대부분의 직장들은 다양한 방식의 호봉제로 운영되고 있다. 40대가 되면 자연스레 쌓인 연차에 따라, 팀장/부장/파트장처럼 명칭은 다르지만 관리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물론, HR의 서로 다른 기준에 따라 승진이 결정되지만, 모든 승진자들이 관리자로서의 자질이 갖춰져 있는 것은 아니다. 함께 팀원이었던 동료들은 거리를 두기 시작하며, 동지의 입장에서 서로를 관찰하고 평가해야 하는 서글픈 상하관계로 전환된다. 우유부단함은 지탄의 대상이 되고, 단호한 의사결정과 경영진과의 친밀함이 드러나면, ‘사람이 어떻게 저리 순식간에 변한데..?’ 수군거린다. 많은 경우 임원으로 가기 직전의 직전 단계이기에, 경영진으로부터 받게 되는 압박과, 가족으로부터 느껴지는 기대감은 벅차기만 하다. 팀원들과도 터놓고 얘기하지 못하게 되며, 팀장 교육 등 여러 세션에서 마주친 같은 직급의 동료들과 급격히 친해지게 된다. 하지만, 그 마저도 정보수집을 위한 인맥관리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다시 외로워진다. 친구들에게 고민을 터놓고 싶어도, 배부른 소리 한다며 투덜대니, 온전히 내가 감수하고 소화해야 하는 스트레스이다.
3. (비자발적) 퇴사
관리자로의 승진과 이어지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관리자로서의 테스트에서 성공적이지 못하다면, 임원 승진이 좌절될 것이고, 올라오는 후배들의 압박과 선배들의 눈총을 한 몸에 받게 될 것이다. 내 손으로 사직서를 내고 결정한다고 하여도, 분명 ‘비자발적’ 퇴사이다. 물론 슬픈 전개이지만, 퇴사는 또 다른 기회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40대는 지는 세대가 아니다. 40대는 새로운 시작에 도전할 수 있는 열정이 살아 있는 세대이다. 단순 이직으로 새로운 직장에서 시작을 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창업의 길로 들어 설 수도 있다. 20대의 창업과 30대의 창업이 다르듯이, 40대의 창업은 좀 더 세련되고 안정적일 수 있다. 돌발변수들에 대한 이해도도 높으며, 해결책에 대한 선택지도 보다 다양할 것이다. 다만, 가장으로서의 부담감이 20/30대 보다는 클 것이기에, 모험적인 선택에 있어서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40대는 여전히 그리고 충분히 도전하기 젊은 나이라고 생각한다.
4. 이혼
40 춘기는 위험하다. 심심치 않게 이혼한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들린다. 정신없이 지나온 30대 끝자락에서 질문은 ‘나는 이렇게 부품처럼 소모되다가 사라져 버릴 것인가?’ 였다면 40대의 질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이다. 다시 자아를 찾고자, 스스로에게 질문을 수도 없이 던지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맞는가? 나를 잃은 채로 살아가야 하는가?’. 마찬가지의 고민과 갈등을 거듭하고 있는 배우자와의 충돌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래, 무엇보다 나를 먼저 찾자.’ ‘나를 더 소중하게 대해주자.’ ‘이렇게 살다가는 스트레스로 병에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와 비슷한 결론에 이르게 되면, 결혼생활을 유지하고자 하는 큰 동력인 ‘이해, 배려, 인내’ 등의 신념들은 휴지조각처럼 가벼운 이야기가 된다. 물론, 잘못된 선택을 되돌리고 바로잡는 이혼도 있을 것이다. 경험이 없는 일이라 정답은 모르지만, 더 이상 40대에게 이혼이 아주 생소하거나, 먼 세상의 이야기는 아니다.
사회는 40대에게 많은 것들을 요구한다. 왕성한 경제활동을 통해 젊은 세대와 노년 세대를 동시에 받쳐주어야 한다. 변해가는 시대 속에서, 가족과의 시간도 더 많이 만들어야 하지만, 회사 속 세상은 너무도 빠르게 변해가기에 시간을 투자하며 따라잡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40대가 괜찮다고 생각한다. 가장 건강할 것이고, 가장 경제적으로 여유로울 것이며, 따라서 가장 안정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처음 겪는 40대는 생각보다 혼란스럽다. 만에 하나, 닥칠 수 있는 일들은, 마음의 준비라도 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