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라는 대로 써 오세요.
직장생활을 하며 많은 제안서 요청을 받는다.
RFP (Request For Proposal)가 발행되면, 역량이 검증된 소수의 업체들이 제안서를 제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입찰에 참여하여 최종 선정되면, 일정기간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따라서, 대기업에게 RFP 초대를 받기 위해 경영진들은 사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대한민국에서 주로 갑을관계에서 을 혹은 병/정 에 해당하는 참여업체들은 제안서 작성에 있어서 협상력이 없다. 써 달라는 대로 써야 한다. 임의로 토를 달거나 이의를 제기하거나, 임의로 방향을 설정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안 된다.
지난 10여 년 간, 나는 국내외에서 발행된 수많은 마케팅 RFP에 참여해 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국내 대기업에게서 발행되는 RFP와 해외의 경우는 큰 차이가 있다. 쉽게 아래 예시를 통해 설명해 보고자 한다.
국내 RFP
우리 회사는 "지구는 둥글다."라는 슬로건을 바탕으로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올림픽에서는 "지구는 둥글다."에서 파생되는 또 다른 슬로건을 개발하고, 마케팅 캠페인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1. (최대한 즉시 사용 가능할) 슬로건을 만들어 제안해주세요.
2. (최대한 구체적인) 운영일정을 수립해주세요.
3. (최대한 구체적인) 미디어 운영안들 수립해주세요.
4. (최대한 구체적인) 예산 운영안을 수립해주세요.
기한은 오늘로부터 14일입니다. 짧은 작성기간을 요청드려 죄송하지만, 마케팅 일정이 빠듯하여 어쩔 수 없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해외 RFP
우리 회사는 "지구는 둥글다."라는 슬로건을 바탕으로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올림픽에서는 "지구는 둥글다."에서 파생되는 또 다른 슬로건을 개발하고, 마케팅 캠페인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1. 선정 시, 상기 업무 수행을 위하여, 귀사가 어떤 비슷한 일을 수행한 경험이 있는지 알려주세요.
2. 선정 시, 상기 업무 수행을 위하여, 귀사가 보유한 강점은 어떤 부분인지 알려주세요.
3. 위 업무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하여, 어떤 부서가 참여할 예정이며, 주요 인력 구성을 알려주세요.
기한은 오늘로부터 14일입니다. 각 참여사 별 발표일정은 조율하여, 추 후 협의를 요청하도록 하겠습니다.
국내의 제안서 요청은 늘 최대한 구체적인, 최대한 즉시 사용 가능한 안을 요구한다. 반면, 해외의 RFP는 해당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검증하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왜 일까?
지난 경험을 통한 관찰의 결과, 업체 선정 직 후 어떤 업무가 진행되는지에 큰 차이가 있었다.
국내 대기업들은 업체가 선정됨과 동시에, 경영진 보고가 이뤄져야 한다. 다만, 이 보고는 "A업체를 선정하였습니다."가 아니다. 보고의 스토리라인은 "우리 부서는 다가오는 마케팅 캠페인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전략을 수립하였습니다. 구체적인 운영안과 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그리고 여러 요소들을 고려했을 때, A업체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선정하게 되었습니다."이다.
A업체 제안서의 핵심 내용은 해당부서의 전략으로 사용되고, 업체 선정은 나름의 기준으로 그냥 우리가 알아서 "잘" 선택한 것으로 포장된다. 해당 전략이 전부 A업체의 제안으로 보고되면, 해당부서는 아무것도 안 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10여 년간의 관찰을 종합해 볼 때, 모든 직장인들은 '아무것도 한 게 없네.'라는 상사 혹은 동료들의 평가를 가장 두려워한다. 따라서, 서슴없이 '을'의 제안을 자신의 아이디어로 포장하여 보고한다. 죄책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을'에게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좋은 전략을 손에 넣은 것조차, 어느 정도 자신의 능력이자 성과로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회사 내 엄격한 상하관계라는 또 다른 갑을관계가 강력하게 개입된다. 더 나아가, 좋은 제안을 상부에 보고하여 A업체로 선정이 된다면, 그로 인해 자신의 '표절, 무단 도용' 은 사면된다고 생각한다. 선정되지 않은 업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당연히 Rejection Fee (최소한의 참여비)는 지급되지 않는다. 우리 같은 대기업이 RFP에 초대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의 마음을 갖기를 바랄 뿐이다. 이렇듯, 여러 단계에서 내재된 갑을관계가 합리화되면, 파생되는 다양한 부조리 또한 눈 녹 듯 합리화된다.
반면, 대부분의 해외 RFP는 업체 선정 직후, 업무가 시작된다. 장시간 워크숍으로 서로의 생각을 맞춰나가며, 구체안을 수립한다. 문화와 생각의 차이로 상당히 고통스러운, 초기 설정 기간이 존재하지만 이를 당연한 과정으로 인식하고 충분히 서로 이야기한다. 모든 창작물은 공동의 결과물이며, 해외의 대기업들은 전문영역의 파트너들과의 협업/외주를 당연한 성공 요소로 인식한다. 토론의 시작점이 백지상태이니, 결과 또한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얼마 전, 국내에서 아무런 맥락도 없어 보이는 내용의 SSG의 광고가 있었다. 뜨거운 관심 속에 기획자에 대한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의 한 마디는 "이런 제안을 수용해 준, 광고주에게 영광을 돌리겠습니다."였다.
이 한마디가, 폐쇄적인 갑을관계에서 많은 창의성들이 무시되고 소멸되어가는 국내의 마케팅/광고 산업의 문화를 역설적으로 잘 반영한다.
오늘도, 대한민국의 갑들은 을에게 공식적으로 요구한다.
"갑이 을에게 정식으로 제안서를 요청합니다. (제발, 기한에 맞춰, 쓰라는 대로 써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