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득히 그리운 이들에게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베껴 쓴다.
한강은 여러 '흰' 것들을
열거한다.
그리고 말한다.
한 단어씩 적어갈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이 책을 꼭 완성하고 싶다고, 이것을 쓰는 과정이 무엇인가를 변화시켜줄 것 같다고 느꼈다. 환부에 바를 흰 연고, 거기 덮을 흰 거즈 같은 무엇인가가 필요했다고.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
한강의 이야기 끝에
나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고, 또 흔들릴 수 없었다.
몇 편의 글이 지나쳤을까.
토막 난 글들이
나를 베고 또 멈췄다.
그런 그녀가 이 도시의 중심가를 걷는다. 네거리에 세워진 붉은 벽돌 벽의 일부를 본다. 폭격으로 부서진 옛 건물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독일군이 시민들을 총살했던 벽을 떼어다가 일 미터쯤 앞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그 사실을 새겨놓은 낮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 앞에 꽃 항아리가 놓이고 여러 개의 흰 초가 밝혀져 있다.
새벽만큼 짙지 않지만 아직 반투명한 트레이싱지 같은 안개가 이 도시를 감싸고 있다. 강한 바람이 불어와 갑자기 안개를 걷어내면, 복원된 새 건물들 대신 칠십 년 전의 폐허가 소스라치며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그녀의 지척에 모여 있던 유령들이, 자신들이 살해되었던 벽을 향해 우뚝우뚝 몸을 세우고 눈을 이글거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람이 불지 않는다. 아무것도 소스라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흘러내리는 촛농은 희고 뜨겁다. 흰 심지의 불꽃에 자신의 몸을 서서히 밀어 넣으며 초들 이 낮아진다. 서서히 사라진다.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초
한강. 그리고 그 어머니가 낳은 첫아기.
[흰]은 어쩌면 세상을 떠난 한 아기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어머니가 낳은 첫아기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고 했다.
달떡처럼 얼굴이 흰 여자아이였다고 했다. 여덟 달 만의 조산이라 몸이 아주 작았지만 눈코입이 또렷하고 예뻤다고 했다. 까만 눈을 뜨고 어머니의 얼굴 쪽을 바라보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당시 어머니는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아버지와 함께 외딴 사택에 살았다. 산달이 많이 남아 준비가 전혀 없었는데 오전에 갑자기 양수가 터졌다. 아무도 주변에 없었다. 마을에 한 대뿐인 전화기는 이십 분 거리의 정류장 앞 점방에 있었다. 아버지가 퇴근하려면 아직 여섯 시간도 더 남았다.
막 서리가 내린 초겨울이었다. 스물세 살의 엄마는 엉금엉금 부엌으로 기어가 어디선가 들은 대로 물을 끓이고 가위를 소독했다. 반짇고리 상자를 뒤져보니 작은 배내옷 하나를 만들 만한 흰 천이 있었다. 산통을 참으며, 무서워서 눈물이 떨어지는 대로 바느질을 했다. 배내옷을 다 만들고, 강보로 쓸 홑이불을 꺼내놓고, 점점 격렬하고 빠르게 되돌아오는 통증을 견뎠다.
마침내 혼자 아기를 낳았다. 혼자 탯줄을 잘랐다. 피 묻은 조그만 몸에다 방금 만든 배내옷을 입혔다. 죽지 마라 제발. 가느다란 소리로 우는 손바닥만 한 아기를 안으며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처음엔 꼭 감겨 있던 아기의 눈꺼풀이, 한 시간이 흐르자 거짓말처럼 방긋 열렸다. 그 까만 눈에 눈을 맞추며 다시 중얼거렸다. 제발 죽지 마. 한 시간쯤 더 흘러 아기는 죽었다.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고 모로 누워 그 몸이 점점 싸늘해지는 걸 견뎠다. 더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배내옷
한 단어는 누군가엔
그 의미로,
누군가엔 또 다른 의미로
주어지며 단어 자체가
바뀌기도 한다.
어떻게 하셨어요, 그 아이를?
스무 살 무렵 어느 밤 아버지에게 처음 물었을 때, 아직 쉰이 되지 않았던 그는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겹겹이 흰 천으로 싸서, 산에 가서 묻었지.
혼자서요?
그랬지, 혼자서.
아기의 배내옷이 수의가 되었다. 강보가 관이 되었다.
아버지가 주무시러 들어간 뒤 나는 물을 마시려다 말고 딱딱하게
웅크리고 있던 어깨를 폈다. 명치를 누르며 숨을 들이마셨다.
-수의
한강은 작별과
모든 흰 것에 대해 말한다.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뜨고 들은 말을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
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작별
당신의 눈으로 흰 배춧속 가장 깊고 환한 곳, 가장 귀하게 숨겨진 어린 입사귀를 볼 것이다.
낮에 뜬 반달의 서늘함을 볼 것이다.
언젠가 빙하를 볼 것이다. 각진 굴곡마다 푸르스름한 그늘이 진 거대한 얼음을, 생명이었던 적이 없어 더 신성한 생명처럼 느껴지는 그것을 올려다볼 것이다.
자작나무 숲의 침묵 속에서 당신을 볼 것이다. 겨울 해가 드는 창의 정적 속에서 볼 것이다. 비스듬히 천장에 비춰진 광선을 따라 흔들리는, 빛나는 먼지 분말들 속에서 볼 것이다.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모든 흰
글을 베껴 쓴다.
깊은 노을이 스민 곳에
홀로 있는 당신을 상상해본다.
밤이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