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자끄 상뻬. 헌책방. 당신의 편지.

'속 깊은 이성친구' 속 어떤 편지

by 토토

지금은 장맛비가 내리지만, 이 책을 동교동 삼거리 어느 헌책방에서 만난 건 어느 봄날로 기억한다. 겹겹이 쌓인 책들의 먼지를 쓸어내며, 이곳저곳을 훑어보던 중 장 자끄 상뻬(Jean Jacques Sempe)의 삽화가 눈에 띄었다. 이따금 생각나 찾게 되는 그의 그림을 누가 먼저 집어갈까 얼른 품에 안았다.


하지만 그의 그림보다 덜컥, 마음이 멈춘 곳은 1998년 9월 29일, 어떤 이가 기숙사에서 쓴 글이 적힌 페이지였다. 그의 글을 이렇게 시작한다.

창 너머 가을비가
축축하게 오는 게

오늘만큼은
싫지가 않구나.

한 사람의 방. 한정된 시간만 허락되는 기숙사란 공간에서 한 사람이 다른 이에게 편지를 쓴다. 그는 '시간이 빨리 간다'고 말하면서도 '지금 나는 과연 열심히 살고 있는지,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묻고만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책을 건넬 사람에게 말한다.

사람이 자기가 바라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는
너무나 평범한 진리를
끊임없이 부정해 보았지만
이제는 인정하려고 해.

내게는 익명일 수밖에 없는 글쓴이는 책을 건네받게 될 이에게 '나는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한 친구를 위해 이 책을 선물하려고 한다'고 말하며 끝을 맺는다.


어쩌면 그의 편지는 적막한 가을밤 내리는 비처럼 딱딱했을지 모른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한 친구에게 책을 선물하기 위해 적는 글귀마저 무거워질 정도로 그의 마음은 빗물을 머금은 신문지 같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선물한 장 자끄 상뻬의 '속 깊은 이성 친구'는 그와 이 책을 건네받을 이의 마음을 한결 가볍고 또 웃음 짓게 했을 거라 예단해본다. 가벼운 미소와 미소 뒤에 남을 어떤 먹먹함이 가을 낙엽 냄새처럼 짙게 배 있다.

4월의 어느 날 아침, 나는 운명과 숙명이 서로 다른 것이라는 확증을 얻었다. 운명은 아름답고 우아하고 눈매가 슬기로워 보이는 어떤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부르가디에 대로와 마르셀랭 대로 모퉁이에서의 일이었다. 나는 정말로 그녀와 내가 어떤 연분을 맺을 수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나의 숙명이었다.

ㄱ) 나에겐 약속이 있고, 그 약속 장소에 가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빠듯하며, 그 약속은 내 직업상의 성공을 좌우하고 있다는 것.
ㄴ)그 여자는 나에 비해 너무 아름답고 너무 우아하고 너무 똑똑하다는 것.

철학 선생인 내 친구 필립은 운명과 숙명의 차이에 관한 내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삶이 극도로 혼란스러운 것은 바로 그런 미묘한 차이를 구별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지적해 주었다. 그는 내 말을 곡해했다. 우리 사이는 기어이 틀어졌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마리 프랑수아즈는 이따금 자기가 내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웠다고 자책하면서 그 중압감을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그녀가 내게 너무 많이 떠넘겼다는 그 짐의 무게를 나는 별로 의식하고 있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양심의 가책 때문에 그녀가 너무 괴로워할 때면, 나는 그녀를 어떤 레스토랑에 데려가곤 했는데, 그때의 음식 값은 나의 경제적인 능력에 비해 너무 비싼 경우가 흔했다. 그것이 또 자책감을 부추겨서 그녀의 괴로움을 배가시키기가 일쑤였다.
어느 날 밤, 그녀가 내게 말하기를 나에게는 모호한 구석과 수수께끼 같은 부분이 있어서 그것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남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들이 눈길에서 그녀가 말한 바를 확인할 수 있을 듯했다. 그런 점을 악용하거나 뭔가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삼아서는 안 될 일이지만, 그것을 참작할 필요는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되면 많은 것이 달라지게 되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책을 읽다가 이따금 궁금해진다. 1998년 9월 29일. 이 책은 그에게 전해지긴 한 걸까. 언제, 어떻게 동교동 헌책방에 머물게 됐을까.


나는 며칠, 혹은 몇 년 뒤에 다시 이 책을 헌책방에 내놓기로 했다.


글을 베껴 쓴다.

깊은 노을이 스민 곳에

홀로 있는 당신을 상상해본다.

밤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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