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해변에서 혼자, 읊조리는 그녀에게
밤의 해변에서 혼자,
읊조리는 그녀에게 전하는 글
천의 얼굴을 지닌 배우라는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는 난독을 일으키는 허공의 표정을 지녔다. 그 허공을 두어번 헤짚으면 새끼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왼쪽 가슴에 붉은 명찰을 단 사형수의 숨소리가 느껴지기도 한다.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어느 순간 그렇게 나타나더니, 어느 순간 그렇게 서 있는 것이다. 무엇이 그녀에게 그토록 깊은 그늘을 알려준 걸까.
아마도 <화차>의 차경선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지옥 같은 시절을 겪어내며 끝내 자신 스스로 지옥이 되어버린 불의 전차. 차경선을 연기한 그녀는 철저하게 강선영이 되고자 한 차경선의 끝도 없는 불안을 자신의 얼굴 속에 철저하게 봉인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에 입꼬리를 올리고 보조개를 틔우던 공식을 폐기하고, 이야기(시나리오)에 자신을 투신한다. 그녀의 연기가 호평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배우 이민기와 호흡한 <연애의 온도>는 그녀의 연기가 스스로 어떤 지점을 찾고 발을 디뎠다는 인상을 준다. 영화 자체가 기존 멜로, 로맨틱 코미디의 정형성을 깨트리면서 그녀의 연기를 돋보이게 한 점은 있지만, 여주인공 장영을 바라보고 있으면 장영과 그녀를 동일시하게 될 정도로 그녀의 연기는 간결하고 매끄럽다. 장영이 놀이공원에서 이별하고 뒤돌아 걸어가는 장면은 지금까지 두고두고 회자된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가 연기한 장영이 관객 스스로가 자신을 투영하기에 충분히 투명했기 때문은 아닐까.
감독 홍상수와의 첫 작품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그녀는, 그녀가 아닌 다른 이는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지금을 살면서도 사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부유하는 먼지 같다가도 천만근의 불상처럼, 방금 지나간 사람인데 어쩐지 단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사람처럼 그녀는 자유롭게 스크린을 오고 간다.
특히 영화감독 함춘수(정재영 粉)와 처음 만난 장면과 영화 말미 눈발이 날리던 영화관 앞에서의 연기를 눈여겨보자. 그녀의 개성이 확고하게 자리매김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보노라면 이듬해 개봉한 <아가씨>의 히데코가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연기에 음(音)과 향(香)이 있다면 <아가씨>의 히데코는 그녀만의 음과 향이 응축된 인물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것 같다. <화차>의 차경선부터,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윤희정까지, 그녀가 연기한 인물들의 점과 점이 모여 어떤 인물화가 그려진 것처럼 히데코는 등장한다. 그녀는 살기 위한 것인지 죽기 위한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히데코의 욕망에 결을 내고, 히데코가 숙희와 손을 잡고 달려가는 발걸음에 힘을 싣는다.
그녀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라는 작품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평가를 받았다. 허구의 이야기에 투신하여 차경선이 되기도, 히데코가 되기도 한 그녀는 또 어떤 이가 됐고, 그것으로 또 한 번의 인물이자 기록이 됐다. 그녀에게 구설수와 손가락질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세상에 어떤 이가 되길 시도하는 배우 김민희의 연기는 그녀뿐 아니라 우리에게 어떤 무엇으로든 남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녀의 수상에 박수를 보낸다.
-배우 김민희는 제67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은곰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