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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즈 May 29. 2023

일본 공대의 연구실 선택 방법 (1)

똑똑한 선택

 일본대학은 진급제도를 갖고 있다. 졸업의 가능여부의 판단뿐만 아니라 학년을 올라감에 있어서도 제한이 있다는 뜻이다. 이는 일본의 도제(徒弟)식 교육과 관련이 있다. 일본은 예로부터 스승이 제자에게 지식과 기술을 직접 전달하는 방식인 도제식 교육을 이어왔다. 대학교에 이를 적용하자면, 졸업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지도교수를 선택해야 하고 그 연구실의 정원이 한정되어 있기에 진급 누락자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일제의 잔재로 도제식 교육이 남아있지만 도제식 교육은 스승과 제자의 상하 복종 관계를 피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있어서 학생 인권 문제와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의 변화로 점점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다. 일본 대학들도 도제식 분위기를 탈피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우리 학교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우리 학교는 종을 친다. 수업의 끝과 시작을 알리는 그 종 말이다. 나는 대학에서는 종을 치지 않는다는 것을 3학년이 되고서야 알았다...)


 우리 과는 3학년 때 거의 모든 졸업 학점을 이수하게 되고, 4학년에는 하고 싶은 졸업연구를 생각하며 지도교수님을 선택해서 연구실에 소속되게 된다. 대학원 진학률이 7-80%인 학과 특성상 학부 4학년은 사실상 예비 대학원생으로서 수업을 듣는 학부생의 입장보다는 연구를 하는 대학원생의 입장에 더 가깝다. 그래서 교수님들이 생각할 때 연구를 진행하려면 학부 과목들을 전부 이수 완료된 상태여야 된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그래서 한번 걸러지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우리 과에서 이 '거름망'을 담당하는 과목은 '기계설계'라는 과목이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때까지 배워왔던 모든 역학적 지식과 창의력과 사고력을 총 동원하여 주어진 조건 내에 가장 경제성 있는 기계를 설계해 내는 과목이다. 그래서 통신이 가능한 전자기기를 제외하곤 모든 교과서와 참고서 프린트 등이 지참 가능하다. 그러나 대학에서 오픈북 시험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설명 안 해도 다들 알 것이다. 그리고 나는 첫 번째 시험을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결국 유년을 하게되었고 이듬해 두 번째 시험때 좋은 성적으로 통과하게 되었다. 


 무사히 졸업반 진급이 결정 나면 이제는 연구실을 정해야 한다. 우리 과는 대단히 자극적인 방법을 이어오고 있다. 3학년 2학기의 성적 발표가 끝나면, 학과 내에서 다시 한번 성적 정리가 들어간다. 담당 교수님의 재량으로 필수 과목과 선택 과목, 교양등을 분류해서 중요도를 나누고 필수 과목 성적의 반영비율을 가장 높게 하여 점수를 매긴 후 1등부터 마지막까지 순위를 정한다(자세한 과정은 학생들에게 공개하지 않으며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정해진 순위는 학생 개인에게 이메일로 통지한다. 고등학생 때도 내 적나라한 등수를 몰랐던 것 같은데 대학에서 등수를 알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무튼 등수가 정해지면 '전략'을 짜야한다. 왜 '전략'씩이나 필요한지 지금부터 설명하겠다. 우리 과는 총 12개의 연구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총 학생수를 열 두 등분하여 고르게 배정한다. 예를 들어, 작년 진급자수는 총 121명이었고 여기서 연구실 선택권이 없는 최하위권 가챠조(*랜덤조)를 빼고 나면 109명이 열 두 등분되어 한 연구실에 9명 혹은 10명이 배정된다. 여기서 문제는 대학원 진학 여부이다. 매년 내부 선발로 진학할 수 있는 정원은 각 연구실당 7명으로 고정이다. 내부진학 선발 기준은 무조건 학부 성적순이며, 대학원 진학을 희망한다면 7등 안으로 들어가야 안전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전략'이 필요하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대학원을 갈지 안 갈지에 따라 7등 밖으로 들어가더라도 대학원 진학이 가능할지가 갈리기 때문이다. 약간의 정보 싸움인 것이다. 등수 공표가 끝나면, 정해진 날짜에 강의실에 모여서 라이브로 배정을 시작한다. 큰 스크린에 12개로 나뉜 엑셀표를 띄워놓는다. 그리고


"1등부터 10등까지 나오세요"


라는 말과 함께 나의 등수를 전체 공개하며 앞으로 나가 내 이름과 학적번호를 원하는 연구실 빈칸에 입력하면 된다.



 나는 입학할 때부터 가고 싶은 연구실이 확고했다. 입시 때 자기소개서에도 분명하게 기재했고 면접 때도 강하게 언급했었다. 나중에 그 연구실 교수님의 얼굴을 알게 되고 면접관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굉장히 부끄러웠다. 그 연구실은 의료 로봇을 연구하고 있다. 아이언맨슈트 같이 사람이 입어서 힘의 보조를 받을 수 있는 '웨어러블 로봇'이 주 연구테마이다. 이 교수님의 신문사 인터뷰를 보면, 당신의 꿈이 장애인의 자립이라고 했다. 무엇이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던 나는 그 연구실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연구실은 우리 과에서 가장 소문이 많은 연구실이었다. 나보다 일 년 선배인 Y언니는 신입생인 나에게 말했었다. 그 연구실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다고. 가장 인기가 없는 연구실 탑 3에 해당한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로봇은 모든 공돌이들의 로망이다. 심지어 입는 로봇이라니! 아이언맨 같지 않은가! 그러나 학교를 다녀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교수가 또라이문제이다. 이 교수님은 웨어러블 로봇을 가지고 학교 벤처를 운영하고 있다. 연구 성과를 가지고 사업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지 교수의 인성문제 인지 학생들을 굉장히 착취하기로 유명한 '블랙' 연구실이 되었다. 나랑 같은 꿈을 갖고 있던 Y언니는 결국 꿈을 따라 그 연구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연구실을 고민하고 있을 때쯤 단호하게 말했다. 원수도 한 번쯤은 말릴 거라고.


 만약 한 번에 진급을 했다면 고민할 틈도 없이 그 연구실에 지원했을 것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분야가 정말 원하는 분야이다 보니 힘들다고 들려오는 소문이 오히려 도전정신을 불러일으켰달까. 그런데, 유년을 하게 되고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다. 생각은 고등학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이과를 선택한 순간, 기계과를 선택한 순간, 불합격의 순간, 유학을 선택한 순간, 그리고 우리 학교를 선택한 순간까지. 후회되는 선택은 없다. 항상 최선을 택했으니까. 하지만 그때의 '최선'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나는 내가 갖고 싶은 걸 선택해 왔다. 내 눈에 멋있어 보이는 것. 내가 잘하고 싶은 것. 언제나 진심이었기에 간절하게 노력했다. 하지만 나는 항상 버거웠다. 항상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뒤따라가기 바빴다. 그리고 결과는 겨우 겨우 딱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만 나왔다. 그리고 결국 유년까지 왔다. 한번 넘어지고 나니까 겁이 좀 났던 것 같다. 이제는 똑똑한 선택을 하고 싶어졌다. 잘하고 싶은 것이 아닌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자신 있게 남들 앞에 설 수 있는 것.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땅을 딛고 서 있는 것.


 로봇 연구는 내가 갖고 싶은 것이었다. 내 꿈이었다. 아이디어를 내고 설계를 하고 사람들에게 이롭게 쓰이는 로봇을 만드는 것이 내가 공학을 배우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부를 할수록 고민이 됐다. 로봇 분야, 특히 의료 로봇 분야는 채용 인원이 매우 적다. 로봇 강국이라 불리는 일본조차 신규 채용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소수의 천재들이 이끌어 가는 분야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주체적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아닌 남들이 만들어 가는 걸 옆에서 지켜보는 역할을 하게 될 것 같았다. 이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 블랙이라고 소문난 연구실 분위기까지 나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입학 후 3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연구실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케부쿠로에 위치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 카페. 테라스 석에 앉는 걸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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