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재는 한꺼번에 온다
비가 올 것 같았다.
바람 속에서 옅은 비냄새가 맡아졌다. 얇은 빗방울도 조금씩 떨어졌다. 우산을 들고 오기는 귀찮아서 후드티 모자를 대충 둘러쓰고 실험실로 향했다. 이제는 꽤 몸에 익은 실험이다. 제일 첫 과정은 디스크를 연마하는 것. 표면을 정해진 거칠기로 만드는 작업이다. 자신 있어. 한 번에 끝내자. 그런데 처음 써보는 디스크여서 그런가? 한 번에 성공하지 못했다. 다시 연마를 했다. 실패했다. 다시 했다. 또 실패했다. 그렇게 저녁밥도 잊은 채 재시도를 거듭하여 시간은 어느새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연마를 마친 디스크를 가지고 불이 꺼진 캠퍼스 가로등을 지나쳐 연구실로 돌아왔다. 윤활유를 아침에 미리 만들어 둔 덕분에 바로 기계를 가동할 수 있을 거다. 자정부터 비가 온다는 것을 보고 빠르게 디스크를 세팅하고 뚜껑을 덮었다. 테스트 버튼을 누르고 아무도 남지 않은 연구실의 불을 끄고 문단속을 하고 후다닥 집으로 향했다.
다음날 아침.
비자를 받으러 가는 날이다. 역시 비가 오고 있다. 오히려 비가 와서 사람이 적지 않을까 기대를 해본다. 나갈 준비를 다 마쳤을 무렵 연구실에서 연락이 왔다. 기계가 멈췄다고. 급하게 연구실로 갔다. 디스크를 고정시킨 나사가 풀려있었다. 분명히 꽉 조였었는데... 어제부터 일이 잘 안 풀리네... 하며 다시 나사를 조이고 서둘러 출입국관리국으로 향했다.
접수를 하고 대기 소파에 앉았다. 졸업까지 일 년이 남았으니 비자 기간이 일 년 정도가 나올 것이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대기 시간 후 내 번호가 불렸다. 기쁜 마음으로 새 재류카드(*외국인 신분증)를 받고 바로 채류기간부터 확인했다.
'5개월'
분명 5개월이라고 쓰여있었다.
왜...? 유년 했다고...?
납득할 수 없는 기간에 상담창구로 가서 떨리는 목소리를 꾹 누르며 물었다. 졸업이 일 년이 남았는데 왜 5개월이냐고. 유년 해서 그런 거라면 출석률도 좋고 성적도 괜찮은데 왜 5개월이냐고. 내막을 확인해 다 준 직원의 대답은 뻔했다. 유년 해서 그렇다고. 일 학기가 끝나고 졸업 가능 여부를 확인하고 싶다고.
눈이 아파왔다. 목이 메었다.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가장 구석에 있는 칸으로 들어갔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조금 풀자 울음이 새어 나왔다. 비자기간은 그 사람의 체류 가치를 대변한다. 이 사람이 이 기간만큼은 필요하다고. 6년이다. 스무 살 때 넘어와 6년을 열심히 달려왔다. 대학에 들어와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내 가치를 의심받고 있다. 어느새 눈물은 양 볼을 다 적셨다. 아직 유년이 상처였나 보다. 유년이 확정된 순간부터 나는 계속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했다. 열심히 해왔다고. 대충 살지 않았다고. 나도 쓰일 가치가 있다고.
어제는 유독 잘 풀리지 않는 하루였다. 달라진 건 없는데 낯선 그런 하루. 땅을 딛고 서 있지 않은 기분. 그래서 발 끝이 무서워지는 하루. 비자 기간 그거 사실 별일 아니다. 돈이 들고 귀찮아졌을 뿐. 그렇지만 차곡차곡 쌓아 올린 자신감에 살짝 금이 갔고 톡 치니 저항 없이 무너졌다. 한참을 울고 나니 시원해졌다. 울고 싶었던 나에게 출입국 관리국이 뺨을 때려준 것 같다.
그럴듯한 자아성찰로 마무리하고 싶지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어찌할 힘이 없다. 이렇게 한꺼번에 밀려온 날은 그냥 넘어져있고 싶다. 실컷 울고 흘려보내자. 수많은 날 그래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