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즈 May 19. 2023

일본 대학원생의 사회생활

학생과 사회인의 경계

 나는 학교에서 굉장히 좁은 인간관계를 갖고 있다. 원래도 먼저 말을 거는 성격이 아니지만, 일본어를 고작 2년 배우고 남학생들로 득실거리는 공대 교실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R군과 K군 과는 한국인 동기를 통해 연을 맺게 된 친구들이고, 온전히 나의 힘으로 얻게 된 친구는 다섯 손가락에 꼽는다. 그런데, M1 (석사 1학년) 중에 R군을 포함해서 3명이나 친구이고 이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M1의 나머지 3명도 지나가다 얼굴 한번 정도는 본 사이였고 그러다 보니 초면인 동기들보다 M1들과 함께 있는 것이 마음이 놓이고 편했다. 물론 약간의 문제는 있었다. 바로 호칭 문제. 일본에선 나이보다는 상하 관계와 친밀도에 의해서 호칭이 달라진다. 한국인에게 가장 와닿게 설명을 하자면, 일본인들은 가족끼리 존댓말을 쓰지 않는다. 어린아이들도 자신의 조부모에게 반말을 한다. 따라서 연구실 선배에게는 당연히 존댓말을 써야 한다. 이미 친구였던 R군을 포함한 세명과는 평소처럼 편하게 말을 했지만 나머지 3명에게는 깍듯이 존댓말을 했다. 여러 명이 섞여있을 때는 누구한테는 반말하고 누구한테는 존댓말을 하는 상황이 어지러웠다. 그래도 끝까지 존댓말을 하는 게 낫다는 직장인 친구의 조언을 받아드려 지금까지 존댓말을 이거 나가고 있다.



 정식 개강 전 점심시간, 여느 때와 같이 출근을 하지 않은 동기들의 빈자리로 정적이 감도는 연구실을 뒤로하고 나는 R군이 있는 대학원생실로 향했다. 맛없는 학생식당 대신 다 같이 학교 밖 식당으로 향했다. 아직 새 학기의 기분이 남아있는 시기, 나는 다시 새내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선배가 된 친구들의 연구실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었다. 그런데, R군과는 묘하게 어색했다. 무엇인가 막이 있는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소속감과 설렘에 들떠 말을 거는 나에게 여느 때처럼 상냥하게 웃어주긴 했지만 그가 말을 덧붙이지는 않아서 소통이 되고 있지 않는 그런 묘한 느낌이 들었다.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R 군이기에 혹시 내가 실수를 한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까지 했다. 다른 날, 대학원생실에 일이 있어 갔다가 말을 걸었을 때도 확실히 막이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밤 아홉 시를 넘긴 늦은 시간, R군과 단둘이 실험실에 있게 되었다. 나는 그날 실험이 밤 10시에 종료될 예정이어서 대기를 하고 있었고, R군은 연구를 하고 있었다. R군에게 약간은 서운한 감정이 남아 있던 내게 그는 유즈쨩도 이 실험기기를 쓰게 될 수도 있다며 자신의 실험을 구경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열정 넘치는 신입이었던 나는 연구노트와 볼펜을 챙겨 R군을 따라 실험실로 들어갔다. 실험실에서의 R군은 내가 알던 R군이었다. 편한 목소리와 편한 말투 편한 농담들이 오갔고 그제야 나는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즐겁게 실험을 배우고 있던 찰나, K상이 빈병에 약품을 채우러 실험실에 들어왔다. 커다란 병에서 작은 병에 약품을 채우기 위해선 깔때기를 받쳐야 한다. 이 작업은 혼자 하기 어려워서 K상은 놀고 있는 듯이 보이는 나를 소환하여 돕게 하였다. K상은 나에게 일본에서 여행을 다닌 적이 있는지 물었고 나는 최근에 스키여행으로 어딘가를 다녀왔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딘지를 묻는 그에게 나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며 같이 갔던 R군에게 정확한 지명을 물었다. 그러나 R군은 내 말을 잘 못 알아들은 것인지 대답을 흘렸다. 예상 못한 상황에 급 외국인 모드가 된 나는 K상에게 대답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대화는 어색하게 종료되었다. 약품을 다 따라낸 K상은 실험실을 나갔다. 그때 R군이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유즈쨩 있잖아 우리 노는 얘기는 연구실에서 안 하면 좋겠어. 특히 K상에게는 놀러 다니는 걸 들키고 싶지 않거든"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R군은 사회생활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어른들의 공적인 자리에서 철없이 떠들고 다니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이때까지 느꼈던 R군과의 어색했던 대화들이 떠오르며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점점 반감이 들었다. 여기가 직장은 아니지 않은가. 엄연히 여긴 학교고 다들 대학 친구들인데 그렇게까지 선을 그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R군의 이 태도는 나의 고민을 풀어줄 열쇠가 되었다. 그때의 나는 동기들과의 관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연구실을 옮기고 싶다는 극단적이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어쩌면 연구실 동기들을 정말 잘 지내야 되는 '친구'로 여겨서 생기는 고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전환해서 연구실을 '직장'으로 설정하고 동기들을 '직장 동료'로 생각하고 나니 놀랍도록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 좋은 것이고 나는 내 할 일을 잘 해내면 되는 것이다. 하나로 뭉쳐지지 않아도 어수선해 보이거나 서운해지지 않게 되었다. 날 불편하게 하던 동기들의 행동이 더 이상 신경이 쓰이지 않게 되었다. 비로소 이 연구실에서 나의 중심을 잡게 되었다. 역시 R군은 남다른 친구이다. 나에게 좋은 친구이자 존경하는 선배가 되었다.


R군과 함께 갔던 스키장 꼭대기. 처음 스노보드에 도전한 역사적인 날이다!


 

이전 03화 상사의 선물이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