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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즈 Jun 02. 2023

일본 공대의 연구실 선택 방법 (2)

염불보다 젯밥

 3년 동안 한 연구실만 바라보다가 다른 연구실을 고르려니 딱히 마음에 확 와닿는 연구실이 없었다. 우리 과 연구실은 크게 다섯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재료역학, 유체공학 및 열역학, 기계역학 및 자동제어, 설계공학, 기계 물리학 이렇게 나뉜다. 여기서 일단 유체, 열, 기계 물리학은 탈락이다. 교수님 성격은 대체로 무난 무난 하지만 보통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연구실이라 프로그래밍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는 전혀 흥미가 없는 분야이다. 따라서 남은 것은 기계역학 및 자동제어, 재료역학 이 두 종류 중에 고르면 된다. 여기서 재료역학은 또 배재시켰다. 가장 머리 아프게 한 과목이기도 하고 그중 한 교수님은 일 학년 수업시간 때 세계 2차 대전 때 쓰이던 전투기 얘기를 꺼내시며 불편한 사람 있으면 나가도 좋다 했던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가기 싫었다. 게다가 그 연구실은 로봇 연구실보다도 인기가 없는 가장 인기가 없는 연구실이어서 아쉽지가 않다. 로봇분야를 포기하고 고르는 연구실이기에 남은 선택지는 설계공학뿐이었다. 설계공학 연구실은 두 개가 있으며, 그중 한 개가 날 유년시킨 과목 담당 교수님이다. 이 교수님은 나에게 꽤 친절하셨고 대학원생들을 힘들게 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분야도 이곳저곳 적용시키기 좋은 분야여서 살짝 관심이 갔지만, 무엇인가 교수님이 학생 지도에 너무 관심이 없는 느낌이 들었다. 뭐든지 장단점이 있어서 너무 편하다고 소문난 연구실은 그만큼 얻어갈 게 없다. 따라서 남은 선택지는 딱 하나였다. 설계공학 중에서 구체적으로 '트라이볼로지'를 연구하는 연구실이다. 현재 내가 소속된 연구실이다.




  저번 에피소드에서 설명했듯이 우리 과는 연구실 배정 기준이 깨끗하게 성적순이다. 현장에서 라이브로 배정을 진행하기 때문에 그 어떤 비리도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예외인 연구실이 딱 하나 있다. 바로 우리 연구실. 이 연구실은 유일하게 교수님 개별 면담을 봐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이것 또한 우리 연구실 교수님이 나이가 지긋하시고 연구성과가 좋아서 학과 내에서 서열 2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가능한 권력 행사이다. 막내 교수가 '저는 따로 면접을 보고 학생을 뽑겠습니다'라고 말할 순 없지 아닌가. 나중에 R군에게 확인한 결과 권력이 맞다고 한다. 아무튼 면접까진 아니고 면담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공적인 자리에서 일본어로 말을 하는 것은 항상 무서웠다. 그래도 그 부담감을 이겨내고 이 연구실에 들어가려던 이유는 또렸했다. 이젠 잘할 수 있는 걸 선택하고 싶었으니까. 이 연구실은 실험계 연구실로, 주제를 정하고 실험을 해서 이 실험 결과가 왜 이렇게 나왔을까 하는 결과를 보고 이유를 생각해 내는 순의 연구 과정을 갖고 있다. 이런 연구 과정이 무(無)에서 유(有)를, 그러니까 아이디어를 내서 개발을 해야 되는 로봇 분야를 포기한 차 선택지로 딱 알맞았다. 아버지 또한 나의 체력을 걱정하시며 로봇분야에서 여성 엔지니어들이 오래 못 버티는 걸 생각하면 아주 작은 범위를 연구하는 우리 연구실이 나에게 적합할 것 같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가장 매력적인 것은 국제 학회 진출이었다. 우리 연구실은 학생들의 학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매년 미국 유럽 아시아 각지로 학생들이 국제학회에 나가서 발표를 한다. 순수 공학적 실력으로 승부 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기에, 국제 학회에서 발표를 하는 것이 훗날 나를 어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스펙일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까지는 정말 순수하게 공부 실력으로 평가받고 인정받고 싶어 했지만 이제는 똑똑한 선택을 하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이때까지 발표만큼은 필사적으로 일본인 조원에게 맡기고 피해왔지만 사회에서까지 발표를 피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학생 때 강제로 피할 수 없는 환경에 들어가서 훈련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교수님이 혐한이 아닌가 하는 의혹과 발표에 대한 두려움과 면담을 봐야 된다는 부담감을 이겨내고 나는 면담 신청 메일을 보냈다.


 면담이 부담이 되는 만큼 준비를 철저히 했다. 예상 질문들을 선정해서 거기에 맞는 답변을 워드로 정리하고 외웠다. 평소 후드티만 입고 다니지만 면접날은 나름 단정하게 셔츠에 니트 조끼도 입고 화장도 했다. 너무 긴장을 한 나머지 약속시간보다 15분 일찍 도착해서 무거워 보이는 연구실 문 앞에서 가만히 서있었다. 정각이 되면 노크를 해야지 하고 기다리고 있던 찰나 교수님이 걸어오셨고 나를 알아보시고 바로 안으로 들어가자 하셨다. 입시당시 배웠던 면접 예절등을 되뇌며 최선을 다해 예의를 지켰고 준비한 대답들을 머릿속에서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준비한 대답을 아무것도 못했다. 면담은 생각보다 매우 간단했다. 정말 면접이 아닌 면담이었던 것이다. 그저 나의 성적을 물으셨고 대학원 진학 여부와 하고 싶은 연구 테마를 물으셨다. 그저 단답이 오갔고 교수님은 알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며칠 후 내정자 명단에서 내 학적번호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연구실 배정일 전에 이미 내정이 되었고, 배정 현장에서의 긴박하고 긴장되는 경험은 안 해도 됐다. 등수가 공개되는 건 창피했지만 생각보다 본인들 상황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남 등수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마음 편하게 친한 친구들의 한 끗 차이로 희비가 교차하는 드라마 같은 순간을 보는 게 매우 재밌었다. 참고로 K군은 하나 차이로 내가 원래 원하던 로봇 연구실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가게 됐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연구 테마에 대한 흥미보다는 연구실에서 얻을 수 있는 '스펙'에 집중하여 연구실을 고르게 됐다. 염불에는 관심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뜻이다. 결국 이 선택이 지금의 나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친구집 창문으로 보이던 무지개. 한창 시험기간 때 숨 돌리며 봤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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