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 연구실의 구성원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우선 절대권력의 교수님이 계시다. 그다음, 학생도 교원도 아니신 기업분이 한 분 계신다. 두 어른들 밑으로, 조교 선생님인 K상이 있다. 그 밑으로 사회인 박사 2명, 석사 2학년(M2) 4명, 석사 1학년(M1) 6명, 그리고 나와 내 동기들(B4)이 있다. 우리 교수님은 학부 석사 박사 모두 일본 최고의 공대라 불리는 국립대를 나오시고 교수로서의 커리어만 우리 학교에서 시작하신 분이다. 더 좋은 학교에서 모든 학위를 받으시고 왜 우리 학교에서 교수직을 시작하셨는지 의문이 들었었는데, R군의 정보에 의하면 그 학교에서 원하는 연구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사실 연구 환경, 자본, 명성 등을 고려했을 때 그곳에서 원하는 연구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이 잘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어른의 사정' 이라길래 더 이상 묻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올해 나의 기수가 17기인 것을 보아, 정교수직을 16년을 이어오신 은퇴를 4년 앞둔 원로 교수이시다. 현재 기계공학과 서열 2위이시고 은퇴를 2년 앞두고 계신 서열 1위 교수님이 은퇴하시고 나면 학과 전체에서 절대 권력을 지니게 된다. R군이 매우 걱정하고 있다. 교수님의 얘기를 하자면 끝이 없으니 이 이야기도 아껴서 푸는 게 나을 것 같다.
연구실이 정해지고 개인 연구 주제를 정해야 됐다. 이 연구실을 고를 때 나는 전기자동차(EV)를 하기로 마음먹었었다. 오로지 로봇만을 바라보다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을 때는 이미 마음이 동하는 것을 선택하기보단 앞으로 전망이 밝은 분야를 선택하고 싶었다. 큰 범위에서는 전기자동차의 모터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세부 분야는 윤활유 혹은 텍스쳐(무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윤활유 쪽이 이것저것 첨가제를 바꿔가면서 실험하면 결과 내기도 수월하고 재밌을 것 같았다(지금에서야 깨달은 이야기지만 나는 정말 생각이 짧았다...). 연구실에 배정되고 한 달쯤 지나자 교수님의 단체 메일이 도착했다. 내용은 신입 B4에게 조금 빨리 시작해주었으면 하는 연구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내가 관심을 갖고 있던 윤활유 관련 테마였다. 그리고 뒤에 덧붙인 말씀이 나를 두근거리게 했다.
'연구 성과에 따라 올 가을에 있는 미국 학회 발표를 고려할 것'
고작 학부생일 때 미국 학회에서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 무엇보다도 이 연구실을 원했던 이유였다. 마침 주제도 내가 고민하고 있던 주제였고 나는 더 망설일 것도 없이 나갈 준비를 하고 바로 학교로 달려갔다.
교수님이 언급하신 데로 상담을 하러 K상을 찾아갔다. 연구실에 없어서 다른 건물 실험실까지 찾아갔다. 아직 몇 마디 나눠보지도 못한 K상에게 나는 다짜고짜 다가가서 말했다. 윤활유 연구 테마를 하고 싶다고 말이다. 교수님 메일을 받고 너무 빨리 찾아간 탓에 K상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조차 못 알아 들었다. 교수님의 메일을 보고 드리는 말씀이라고 설명했고 그제야 스마트폰을 꺼내 교수님의 메일을 확인한 K상은 나에게 그 주제를 맡으라고 했다. 이런 거는 선착순으로 먼저 고르는 열정 있는 사람이 맡는 것이라고 했다. 아마 이것을 계기로 K상에게 내가 매우 적극적인 이미지가 된 듯싶다. 그렇게 연구 테마가 정해졌고 K상은 나에게 미국 학회도 참가하겠다는 뜻으로 알아듣겠다 하였고 나는 흥분되는 마음을 꾹 누르고 최대한 덤덤하게 그러겠다고 했다.
그렇게 내 목표에 한 발자국 다가간 듯했다. 벌써부터 미국에 갈 생각에 들떴다. 며칠 후 K상과 연구 과정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을 전달받았고 하루빨리 결과를 내고 싶다는 열정으로 가득 찼다. 나의 사수로 지정된 R군에게서 정식 개강도 하기 전에 실험 기기의 사용 방법을 익혔고 몇 가지 실험도 진행했다. 물론 기초 지식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저 시험 보기 위해 하던 공부와는 임하는 자세부터 달랐다.
몇 주 후 교수님이 EV팀 전체를 소집하셨다. 새해를 맞아 교수님이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EV팀에게 역할 분담과 몇 가지 공지를 하기 위해서였다. 아침부터 떨리는 마음으로 회의장을 들어갔고 기대에 부풀어 교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몇 가지 당부 사항과 함께 국제 학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교수님이 내가 아닌 다른 남자 동기 두 명을 지목하며 올해 교수님과 함께 영국 학회와 미국 학회에 가자고 하셨다. 당황스러웠다. 동기들 중에 EV팀은 나를 포함해서 4명이었고 그 둘은 정말 이때까지 세부 주제를 정하기는커녕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 둘과 학회에 참여하시겠다니. 심박수가 미친 듯이 뛰었다. 나의 떨리는 동공을 눈치채신 건지 교수님이 한 말씀 덧붙이셨다.
"여유가 있으면 유즈상도 함께 가자"
'여유'가 있으면...이라고 분명 말씀하셨다.
'여유'가 있으면 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나는 애써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회의가 끝나고 계속 그 말은 머릿속에 맴돌았다. 미국 학회만을 바라보며 주제를 정하고 개강 전부터 열심히 출근하고 실험을 하고 있는데 내가 아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다른 동기들을 지목한 것도 억울한 와중에 나한테 '여유'가 있으면 가자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의미를 깨달았다.
해외에서 열리는 국제 학회를 갈 경우에는 항공기를 포함한 교통비와 숙박비 등은 연구실에서 전액 지원한다. 여기서 여자인 내가 가게 되면 방을 하나 잡을 거 두 개를 잡아야 된다는 말이 된다. 남자들과 한 방을 쓸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교수님이 말씀하신 '여유'가 된다면의 의미는 진짜 말 그대로 경제적 '여유'가 된다면의 의미이다. 나는 여자이다. 그렇게 태어났다. 이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벽을 마주했다. 내가 노력해서 어찌할 수 없는 벽. 성별이라는 벽. 모두들 열심히 감추고 있어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벽. 부수어버리고 싶었다. 돈이 두 배가 들더라도 열 배가 들더라도 나를 데려가게 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이제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독기가 차올랐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여자'라는 이유로는 절대 지고 싶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