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논문 발표
나는 발표를 무서워한다. 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한국에 있을 때도 발표를 굉장히 무서워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발표를 잘하고자 하는 마음은 커서 여기저기 대회는 많이 나가게 됐었다. 그럴 때마다 나의 발표를 목격한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얼굴과 목소리는 전혀 긴장을 하지 않은 듯 차분했지만 대본을 들고 있는 손은 엄청나게 떨리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 와서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일본어학교를 2년 다녔었는데 연말에 스피치 대회가 있었다. 일본 대학 입시 첫 해, 쓰디쓴 불합격의 고배를 마시고 오로지 입시 공부에만 정신이 팔려있던 시기였는데 반 친구들의 몰표로 반 대표가 됐었다. 담임 선생님께 눈물까지 보이며 하기 싫다 했지만 선생님께선 다정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나를 설득하셨고 그렇게 강제로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대회에서 나는 무려 대상을 탔다(그날 컨디션이 매우 안 좋았는데 대회가 끝나고 병원을 가보니 독감이었다). 첫 일본어 발표였고 대상을 탄 것이 굉장한 터닝 포인트가 됐다. 자신감을 회복한 나는 다시 열심히 달렸고 다음 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외국인들만 모여있던 어학교와는 다르게 대학교는 일본인들 사이에서의 실전이었고, 일본어 한마디 한마디가 내뱉기 무서웠다. 내성적인 성격까지 더해져 학부 때 대부분의 조별 발표는 필사적으로 피해 다녔다. 그렇게 발표 공포증은 더더욱 심해졌다.
우리 연구실은 발표를 많이 시키는 연구실이다. 학생 때부터 각종 국내외 학회 발표에 참가시키는 걸 보면 교수님은 연구도 연구지만 학생들의 프레젠테이션 능력을 중요시하시는 것 같다. 매주 수요일에 전체 세미나가 있고 이주에 한 번씩 그룹 세미나가 있다. 그룹 세미나는 온라인으로 각 팀원들끼리 자신의 연구 과정을 보고하는 간단한 회의이다. 전체 세미나는 주로 학회에 나가는 사람들의 발표 연습이나 박사과정들의 연구 소개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여기에 학생들의 발표 훈련을 위한 '英論発表(영론발표)' 즉 영어 논문 발표가 있다. 이런 발표가 있다는 것은 R군을 통해 미리 알고 있었고 오히려 이걸 통해 발표 공포증을 극복해보고자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개강 2달 후 B4(*학부 4학년)들의 차례가 돌아왔다. 이 발표는 미국 학회에 참가 신청을 넣기 전 유일한 교수님 앞에서의 발표이고 나는 이 발표가 미국 학회 멤버로 선발되기 위한 단 한 발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떨리는 건지 설레는 건지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준비를 시작했다.
먼저 영어 논문을 골라야 한다. 주로 구*스칼라 혹은 Web of Sci****에서 찾게 된다. 논문을 선택하는 기준은 일단 최대 10년 이내의 논문 중에 본인 연구 주제와 관련 있는 것을 선별하고 그중에 인용이 많이 된 것을 선택하면 된다. 논문을 하나하나 다 읽어가면서 고르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기에 보통 초록만 보고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정해진 템플렛을 사용하여 ppt를 만들어야 한다. 이 ppt 양식이 생각보다 자잘하고 엄격하여 이것에 대한 오리엔테이션만 해도 2시간이 걸렸다. 자료 준비가 끝나면 발표 연습을 하고 당일날 교수님과 조교 그리고 박사생들을 위한 발표 자료와 논문 원문을 인쇄하여 회의실에 세팅하고 발표를 하면 된다. 원래는 따로 리허설이 있진 않지만 신입들의 발표는 당일 전 주에 연습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나의 계획은 이 리허설 날짜까지 완벽하게 준비하는 것이었다.
논문을 고르는 것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나는 이미 두 편의 영어 논문을 읽은 상태였고 그중 하나를 발표해야겠다 마음먹었다. 발표를 위해 다시 한번 제대로 읽고 있던 차, R군이 나에게 논문을 골랐냐고 물었고 얼마 전에 R군이 준 논문을 할 거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R군은 그 논문은 이미 선배가 발표한 논문이고 이 발표는 논문을 본인이 고르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했다. 이미 3일가량을 엉뚱한 논문에 허비한 탓에 마음이 급해졌고 수업시간까지 뒷자리에서 몰래 발표할 눈문을 찾았다. 다행히 금방 괜찮은 논문을 발견했다. 나의 연구 주제와 딱 알맞은 내용이었고 비교적 최근인 2020년에 출간됐고 인용 횟수도 22번인 정말 나에게 '딱 맞는' 논문이었다. 바로 R군에게 논문을 보냈고 R군은 정말 괜찮은 것 같다며 적극 추천하였다. 드디어 논문을 고르고 인쇄를 누르려던 찰나 동기가 내가 고른 논문을 보고 놀라며 말했다.
"24페이지나 된다고? 선배가 그러는데 보통 10페이지 이내로 고른댔어. 이렇게 긴 논문은 발표용이 아니라 본인 공부용으로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일반적인 양보다 두 배가 많은 분량이라니! 거기에 나는 영어도 일본어도 내 모국어가 아니다. 이걸로 자료도 만들고 발표도 해야 되는데 과연 내가 할 수 있을지 겁이 났다. 고민되는 마음으로 R군에게 문자를 했다. 그러나 R군의 생각은 달랐다.
"그 소리 누구한테 들었어? 발표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주제랑 딱 맞고 모든 조건 갖춘 논문 찾기 힘들어. 나는 정말 좋다고 생각해. 하지만 네가 힘들다면 바꾸는 걸 말리지는 않겠어"
동기들보다는 현 연구실 에이스인 R군의 말이 더 신뢰가 갔다. 거기다 이 발표는 정말 절실하게 교수님에게 나를 어필해야 되는 단 한 번의 기회이다. 다른 동기들보다 언어 전달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분량으로라도 승부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24페이지 분량의 논문으로 첫 발표를 준비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