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논문 발표 - 한걸음 더
논문 선택을 마치고 리허설까지 약 이 주 정도가 남았다. 일주일은 논문을 완독하고 머릿속에 정리하고 남은 일주일은 ppt를 만들고 발표 연습을 하면 완벽할 것이다. 이미 두 개의 영어 논문을 읽어 보았고 자주 등장하는 단어정도는 암기해 두었기에 완독 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호기로운 마음으로 첫 장부터 읽기 시작했다. 초록 부분을 가볍게 읽고 인트로로 넘어가는 순간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보통 인트로 부분은 본 연구와 관련된 선행 연구에 관한 설명과 연구 목적등이 1-2페이지 정도 분량으로 적혀있는데 이 논문은 인트로 부분만 4페이지가 넘어갔다. 물론 분량이 많은 논문을 골랐기에 어느 정도 긴 건 이해가 되지만 인트로부터 이렇게 길 줄은 몰랐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내용이었다. 내 연구와 관련된 '자동차 윤활유'에 관한 연구였기에 온갖 화학 용어와 유기 화합물 이름들이 튀어나왔다. 나는 과학 과목 중에서 화학을 가장 싫어한다. 전공이 기계공학인 만큼 화학은 1학년때 들은 일반 화학이 전부였고 그것조차 4년 전 일이다. 갑자기 영어로 튀어나온 유기 화학 용어들에 당황하며 허둥지둥 영어 사전과 포털 사이트를 켜고 단어 하나하나를 검색해 가며 한 문장 한 문장 힘겹게 넘어가고 있었다. 무엇인가 정말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차저차 일주일을 꽉 채워서 논문을 다 읽었다. 읽기는 다 읽었다만 확실하게 이해를 했다기에는 애매했다. 실험 과정이나 결과에 관한 부분은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고찰 부분은 인과 관계가 명확하게 설명되어있지 않아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일단 발표를 할 수 있게 자료를 만들어야 했다. ppt를 만드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구실에서 지정한 양식에 맞추는 것이었고 최대한 실수 없이 만들기 위해선 선배들의 ppt를 참고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나는 당연히 가장 신뢰하는 R군의 ppt를 참고하기로 했다. ppt를 만들기 시작하자 욕심이 생겼다. 큰 분량의 논문을 단어 하나하나 찾아가며 오랜 시간 공부했기에 공부한 모든 내용을 담고 싶었다. 마치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 준다는 생각으로 논문에는 설명되어 있지 않은 부분도 추가로 넣었고 강조하는 부분에 동그라미 표시와 밑줄을 세심하게 넣었다. 욕심이 과했던 탓인지 ppt 슬라이드는 끊임없이 늘어났고 리허설 하루 전에야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 부록 없이 무려 35장의 분량이었다.
리허설은 처참했다. 밤을 새워서 당일날 아침에 완성한 대본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 일본어 문장이 넘쳐났다. 내가 읽으면서도 이상한 것을 아니까 더더욱 긴장하게 됐고 말끝은 흐려지고 목소리는 떨려왔다. 발표시간이 30분을 넘어가니 절반정도 지났을 때 발표자인 내가 지쳐버렸다. 연습을 전혀 하지 못한 탓에 일본어 가타카나 표기로 바꾼 화학 용어들이 입에 붙지 않았다. 발표가 끝나고 선배들의 피드백이 이어졌다. 단어 하나하나 꼼꼼하게 봐주며 어색한 일본어 표현들을 교정해 주었다. 창피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이 받아 적기 바빴다. 두 시간의 긴 피드백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정신이 아득해졌다. 잠을 못 잔 탔도 있지만 막막함이 몰려왔다. 가장 큰 문제는 논문 선택도 공부량도 아닌 일본어 실력이었다. 이걸 이제 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아직 뒷 순서 친구가 남았지만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고 짐을 싸서 회의실을 나와버렸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순 없다. 어떻게 서든 완성해가야 한다. ppt를 수정하고 발표 연습을 다시 함에 있어서 나는 어느 정도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나의 일본어 전달력에 맞춰서 자신있게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부분만을 남기고 매끄럽게 설명하기 힘든 자잘한 부분은 과감하게 없앴다. 대본도 아예 없애고 ppt를 보면서 설명하기로 했다. 리허설을 해보니 대본을 갖고 올라가면 처음부터 끝까지 대본에 코를 박고 읽어나가기 바빴다. 당연히 좋은 발표 태도도 아닐뿐더러 오히려 긴장감에 먹혀버렸다. 집에서 컴퓨터 화면을 보며 연습을 했고 순식간에 발표날이 됐다.
나의 순서가 됐다. 첫 장부터 실수를 해버렸다. 첫 장에서 이 논문을 고른 이유를 설명해야 했으나 긴장을 한 나머지 그 부분을 넘어가고 말았다. 이대로 무너질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차분했다. 말이 전혀 빨라지지도 목소리가 떨리지도 않았다. 정말 높은 몰입도와 집중도를 유지했다. 어느 순간 청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고 오로지 스크린과 단 둘이 남은 공간에서 막힘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영어식 표현으로 'In the zone'한 상태랄까. 교수님도 중간에 질문을 하는 등 나의 발표를 매우 집중해서 들어주셨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느낌이었다. 30분을 조금 넘기고 발표가 끝이 났다.
"お疲れ様です。(수고하셨습니다)"
발표를 마치고 들은 교수님의 첫 한마디였다. 이때까지 동기들과 선배들의 발표 후에는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내용에 대한 확인과 질문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 질문들이 나의 공부량과 준비성을 확인하는 듯한 느낌이 아니라 정말 논문에 관해서 같이 의논하는 의도의 내용들이었다. 기뻤다. 연구자가 된 기분이었다. 좋은 분위기로 질의응답이 오갔고 교수님은 연이어 나의 노력을 알아주는 칭찬을 해주셨다. 믿기지 않는 이 순간을, 한 달을 노력해 온 보상을 나는 온몸과 마음으로 누렸다. 끝까지 좋은 말과 함께 나의 첫 발표가 끝이 났다. 세미나가 끝이 나고 연구실로 돌아왔을 때 교수님은 또 나를 부르며 말씀하셨다.
"ユズ さん頑張ったね。 (유즈상 열심히 했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교수님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진 것 같았다.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나의 가능성을 전부 펼쳐낸 것 같았다. 더 이상 어떤 발표에서도 떨 것 같지 않았다. 정말 몰입하기 시작하면 청중이 누구든 몇 명이 있든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나니 말이다. 내가 발표 공포증을 극복했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을 극복해 냈다. 한 단계 성장한 내가 너무나도 대견하다. 온몸이 자신감으로 꽉 차기 시작했다. 미국 학회 모집 마감일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느낌 그대로 꼭 꿈을 이룰 것이다. 좋은 예감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