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하게 정들게 된 과정
내가 로봇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한국의 90년대생이라면 누구나 읽었을 W*y? 전집의 로봇 편을 통해서였다. 그 만화책에는 로봇의 정의와 다양한 현장에서 쓰이는 로봇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중 나의 눈을 반짝이게 한 것은 이족보행로봇이었다. 사람처럼 두 발로 걷고 손가락을 갖고 있는 로봇이 마치 영화 속 상상의 물건이 현실이 된 느낌이었다. 15년도 더 된 책이니 그 책에 소개된 이족보행로봇의 장기라곤 가위바위보라든가 계단을 오른다거나 두 발로 뛰는 것 등이 전부였다. 하지만 책에는 인간이 아무렇지 않게 하는 동작들이 얼마나 복잡한 물리 법칙들로 행해지고 있는지와 그것을 로봇이 하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기술인지가 적혀있었다. 나는 그게 멋있어 보였다. 아마 이것이 로봇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첫 계기인 듯 싶다. 거기에 소개된 로봇은 일본에서 만든 로봇이었고 나는 이 이야기를 일본 대학 입시 때 써먹기도 했다. 약간의 과장은 있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수시를 쓰지 않았어서 일본에서의 입시가 나의 첫 자기소개서였다. 그래서 그때 처음 구체적으로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지 생각하게 되었다. 여러 대학들의 로봇 연구실을 찾아보게 되었고 의료 로봇 분야에 꽂히게 되었다. 무엇이든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중 우리 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내 성적에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대학이었다. 이것이 가장 솔직한 이유고 대외적인 즉 학교에 제출한 이유는 내가 원하는 로봇연구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몇 번 언급한 적이 있는 웨어러블 로봇을 연구하는 연구실이다. 이 교수님은 우리 학교에서 학부 석사 박사를 전부 거치신 분이다. 내 방식 표현으로 '순골 OO대' 교수님이다. 소문에 의하면 일본에서의 첫 드론 연구가 이 교수님의 학부 연구라고한다.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대단한 천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력하게 퍼진 소문은 교수님의 인성 논란이었다.
로봇 교수님을 처음 본 것은 1학년때 기계공학통론 수업이었다(면접관이었으나 내가 기억을 못 하니 이걸 첫 번째라고 하자). 기계공학통론 수업은 매주 다른 업계의 사회인이나 교수님들이 특별 강연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비교적 가벼운 분위기의 수업이었다. 이 수업이 있는 날이 오후에 재료역학 쪽지 시험이 있어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강연을 듣지 않고 시험공부를 했었다. 사실 나도 그중 하나였으나 이날은 내가 가고 싶어 하는 로봇 연구실의 교수님의 강연이기에 노트와 교과서를 가방에서 꺼내지 않고 수업에 집중했다. 이것저것 수집한 자료를 보여주시며 흥미롭게 강의를 이어가셨고 나는 점점 빠져들었다. 그러나 원래처럼 시험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더 많았고 그중에 한 무리가 서로 떠들면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태도가 거슬리신 교수님은 한 번의 주의를 주셨고 두 번째 주의를 주실 때 짐을 싸서 나가라고 하셨다. 순식간의 분위기는 얼어붙었고 지적을 받은 학생들은 강의실 밖으로 쫓겨났다. 정적이 흘렀다. 교수님은 한숨을 한번 푹 쉬고는 이미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지만 이어나가 보겠다며 수업을 이어나갔다. 당연히 딴짓을 한 학생들에게 잘못이 있지만 강의실에서 학생을 진짜로 쫓아내는 교수님을 처음 봤어서 꽤나 성깔 있는 교수님이구나 하는 인상이 심어졌다. 그게 로봇 교수님의 첫인상이었다.
3학년 때 드디어 이 교수님의 '로봇공학' 수업을 듣게 되었다. 내가 학부 때 들은 수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수업이다. 로봇공학 수업은 마치 교수님의 컬랙션을 구경하는 느낌이었다. 매주 자신이 몇십 년 동안 수집해 온 자료들을 공유하시며 그 어느 수업에서도 보지 못한 신이 난 목소리로 강의를 하셨다. 교수님은 자신의 꿈이 장애인의 자립이라고 하셨고 10여 년 전에 참여했던 큰 의료로봇 프로젝트를 소개해주셨다. 의수, 의족부터 시작해서 재활 로봇까지 정말 내가 딱 하고 싶은 연구분야였고 수업을 듣는 내내 꿈에 한 발자국 다가간 듯 두근거렸다. 그러나 교수님은 그 로봇들이 결국 전혀 팔리지 않았다는 절망적인 말로 수업을 마무리하셨다. 충격을 먹은 나는 매주 제출하는 출석과제 모퉁이에 전혀 팔리지 않은 이유를 물었으나 답장을 받지 못했다. 이것이 나의 견고했던 꿈에 금이 간 순간이다. 로봇공학 수업은 두 번의 조별발표가 있었고 나는 그 어떤 과제보다 영혼을 갈아 넣었다. 그리고 다른 조의 발표도 열심히 듣고 나답지 않게 질문도 많이 했었다. 그럴 때마다 교수님이 꽤 흥미로워하시는 것 같았다. 적극성을 인정받은 건지 이 수업은 가장 높은 학점을 받았다.
유년을 하고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니 그 로봇 연구실이 아닌 지금의 연구실을 선택하게 되었다. 연구실이 막 정해졌을 때에는 생각보다 높았던 나의 등수에 놀라고 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지금의 연구실에 들어왔다는 사실에 자부심이 들었었다. R군이 있다는 것도 든든했고 부모님 특히 아빠가 좋아하시는 게 마음이 놓였다. 한창 신입생 환영회 등으로 새내기가 된 듯한 마음으로 연구실에 대한 애정이 차오르던 시점에 로봇 연구실에 들어가 있는 Y언니를 만나게 됐다. Y언니가 당황스러운 일이 있었다며 말을 시작했다. 어느 날 뜬금없이 로봇 교수님이 언니를 붙잡더니 후배 중에 한국인 여자애가 있지 않냐고 물으셨다고 한다. 언니는 나를 안다고 했고 교수님이 말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 친구가 머슬 슈트 하고 싶다고 했어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연구실 가버렸더라..."
매우 놀랐다. 교수님이 나를 아신다니.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가 배정표에서 나를 찾아봤다니. 아니 것보다 머슬 슈트 하고 싶다고 한 게 입학 면접 때인데 그걸 기억하고 있다니. 신기했다. 좀 더 솔직하게는 기분이 좋았다. 아무래도 로봇공학 수업 때 나를 흥미로워하시는 것 같았던 게 기분 탓이 아니었던 듯했다. 그리고 나를 기억하고 기다리셨다는 말에 너무도 죄송한 마음이 몰려왔다. 만약 연구실 선택 전에 교수님이 날 기억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면 나는 고민 없이 그 연구실을 갔을 것 같다. 살면서 나에게 기대를 하고 기다려줄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냐는 말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전하고 싶다. 머슬 슈트를 하고 싶다던 말은 진심이었다고. 교수님의 수업을 가장 좋아했다고. 굳게 자물쇠를 걸어 두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로봇의 방이 남아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