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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즈 Jun 23. 2023

일본 공대생의 연구과정

드디어 미국으로!

 연구실에 배속되고 연구 주제를 정하고 나면 실험 기계의 사용법을 배우게 된다. 내가 사용하는 기계는 이미 R군이 사용하고 있는 기계로 꼼꼼한 R군의 노하우를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R군의 노하우는 실험을 진행할수록 빛을 발휘하여 내가 일으키는 다방면의 '신입의 실수'를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참 운이 좋구나라고 생각했다. 실험 기계의 사용방법을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본격적인 실험이 진행된다. 본격적인 실험이란 연구주제에 맞춘 실험조건 속에서 정밀하게 진행하는 실험을 말한다. 두어 번의 모의실험을 마치고 K상에게서 본격적인 실험을 부탁받았을 때 드디어 나의 연구가 시작되는 것인가 하고 내 마음속의 엔진을 예열시키기 시작했다. 나의 목표는 처음부터 올해 가을에 있는 미국 학회에 나가는 것이다. 드디어 이 여정의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나는 전기자동차 모터에 쓰이는 윤활유에 첨가되는 첨가제의 효과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나의 연구 루틴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먼저 주어진 농도에 맞춰서 윤활유를 제조한다. 그리고 주어진 거칠기에 맞춰서 실험판 디스크를 연마한다. 그리고 제조한 윤활유와 연마한 디스크와 볼을 실험기계에 장착시킨다. 실험판을 장착하고 나면 실험기계에 정해진 조건을 입력하여 기계를 가동시키고 실험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실험이 끝나고 나면 시험판을 꺼내 레이저 현미경과 광학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그 결과를 ppt로 정리하여 K상에게 보고하면 한 사이클이 완료된다. 보통 금요일에 실험을 시작해서 48시간 후인 일요일에 실험판을 꺼내고 월요일에 관찰을 한 후 화요일에 ppt로 정리하여 수요일에 K상에게 보고하는 형식으로 진행했다. 그렇다. 나는 미국 학회에 나가고 싶다는 꿈 하나로 주말 출근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연구실을 다니면서 느낀 건데 일본 대학원은 학비를 전액 납부하고 다니기 때문에 한국처럼 대학원생과 연구생들이 교수님의 '슈퍼 을'이 되어 교수님의 개인적인 잔심부름을 한다던지 연구실의 행정처리를 한다던지 하는 잡무를 하는 경우가 없다. 그래서 나 또한 오로지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있어서 신나게 연구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차이가 일본에서 노벨상이 자주 나오는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불타오르는 열정과 다르게 실험을 진행할수록 뭐가 뭔지 모르겠는 기분이 들었다. 성격상 정해진 루틴대로 반복적으로 실험을 하는 게 적성에도 맞고 재밌었지만 각 실험 결과에 대한 차이를 모르겠다고 해야 하나… . K상에게 실험 결과를 보고하고 나면 K상과 기업 연구원분이 토론을 시작하는데 나는 두 분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일본어 실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전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으면 K상은 나에게 아직 못 알아듣는 것이 당연하다며 언젠가는 알아듣는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미국학회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던 나는 마음이 급했고 알아듣게 되는 '언젠가'를 기다리기엔 학회 신청 마감일이 바싹 다가오고 있었다.


 실험 데이터만을 잔뜩 모으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 결과에 대한 고찰을 할 수 있는 지식 또한 익혀야 했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R군에게 부탁하여 내 연구와 관련 있는 논문을 잔뜩 받았다. 대부분의 논문들은 영어로 된 논문이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영어에 처음에는 고생을 많이 했다. 이상한 고집이 있어서 논문을 통으로 번역기를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영어문장 그대로를 읽으면서 모르는 단어를 사전에 검색하는 방식으로 하나하나 읽어나갔다. 논문에 나오는 전문용어들은 같은 것이 계속 반복되었기 때문에 몇 번 사전에 검색하고 나니 저절로 외우게 되었고 읽는 속도는 점진적으로 빨라졌다(지금은 내 연구와 관련된 웬만한 논문은 사전 없이 읽는 것이 가능해졌다). 논문 이외에도 3학년 때 들었던 트라이볼로지 수업 교과서도 완독 했다. 트라이볼로지 수업을 들을 때는 그렇게 읽기 싫었던 것이 내 연구가 되고 나니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몇 편의 논문과 교과서와 선배들의 졸업논문까지 읽고 나니 점점 눈이 트이기 시작했다. 보는 눈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저 똑같이만 보였던 뭐가 다른 건지 알 수 없었던 실험 결과들의 차이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쌓아온 지식이 정말 얕은 수준의 지식이지만 그 얕은 지식 속에서 떠돌아다니는 한 파편을 집어와 이것이 원인이 아닐까 하는 나름 대로의 고찰이 가능해졌다. 원인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의 희열은 고요하지만 큰 울림이 있었다. 연구의 꽃은 고찰이니까. 그저 실험만 하는 것은 실험 아르바이트생과 다름이 없으니까. 진정한 연구자가 되기 위해 한 단계 성장한 느낌이었다.


 한 단계 성장을 하고 나니 이제는 K상의 지시가 없어도 주체적으로 실험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을 실험하고 얻고자 하는 데이터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첫 실험을 시작한 지 약 3개월이 지났다. 그리고 실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원했던 대로 첨가제의 효과를 입증했다. 물론 각 첨가제의 차이점도 발견하게 되었다. 심장 박동은 빨라지기 시작했고 나는 이때까지의 실험 결과를 모두 정리하여 먼저 K상에게 보고했다. K상은 좋은 실험 결과라고 생각한다며 이 결과를 가지고 교수님과 상담하자고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미국 학회에 참가 여부를 교수님께 상담하다고 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결전의 날, 나는 K상에게 보고했던 ppt자료를 조금 더 수정하여 회의실로 향했다. K상과의 상담에서 나름 희망을 보았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은 있었지만 아직 실험 결과들이 완전하게 정리되지는 않아서 과연 교수님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회의실에 빔 프로젝터를 설치하고 내 노트북을 연결하여 ppt자료를 띄운 후 교수님을 모셔왔다. 정식 발표까진 아니고 나 또한 앉아서 진지하지만 편한 분위기로 보고를 시작했다. 지난번에 성공적으로 발표를 마친 터라 보고 정도는 연습 없이도 매끄럽게 진행할 수 있었다. 보고를 마치고 나니 교수님의 피드백이 이어졌다. 여기서 나는 교수님의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교수님은 달랐다. 당연한 얘기지만 K상과도 전혀 다른 수준의 사람이었다. 나와 R군과 K상이 고민했던 모든 것을 초견으로 깔끔하게 정리해 주셨다. 교수님의 정리를 듣고 나니 뒤죽박죽이었던 결과들이 제자리를 찾아갔고 나의 연구의 '의미'가 만들어졌다. 나의 실험 결과들을 '연구'로 만들어주신 것이다. 이것이 교수이고 이것이 연구 지도라는 것을 체감하였다. 그리고 교수님은 내가 그토록 바라고 바라왔던 말을 해주셨다.


"이 것들을 정리해서 要旨(*논문요약본)를 써오도록. 미국학회 마감일이 다음 주였지?"


 내가 해냈다. 차별과 편견을 이겨내고 교수님에게 인정받았다. 대학에 붙었을 때의 희열이었다. 그 어떤 요행도 아니고 하나하나 쌓아 올린 노력으로 이루어낸 성과이다. 요약본 제출까지 시간이 정말 빠듯하지만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R군 또한 나에게 대단하다며 축하와 격려를 해주었다. 이 감정을 글로 표현하기가 정말 어렵다. 미국 학회에 갈 수 있는 티켓을 받았다. 꿈을 이루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2023년 첫 일출. 나는 올해가 평범하기를 소원했다. 그리고 평범 이상의 최고의 해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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