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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즈 Jun 26. 2023

연구실도 결국 파이 싸움

검은 머리 이방인

 미국 학회 멤버로 발탁되었다. 교수님의 단체 메일에는 올 가을에 있는 ST*E 미국 학회 멤버로 나와 R군을 지정하였다. 드디어 그토록 바라던 바를 이루었다. 아직 정식 지원 전이고 학회에서 허가된 것도 아니지만 교수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거에 큰 의미를 두었다. 교수님과의 미팅 이후로 추가적으로 해야 할 실험이 산더미였지만 일단 마감일까지 고작 일주일밖에 남지 않아서 일단 나와있는 결과로 서둘러 초록을 작성해야 했다. 학회 지원 양식은 학회별로 다르지만 이번 ST*E 미국 학회는 논문 제목과 초록과 본인 이력을 작성해야 된다. 나의 초록을 1차적으로 봐줄 사람은 R 군이었다. R군은 다른 논문들의 초록을 참고하여 작성한 후 K상에게 넘기기 전에 본인에게 먼저 공유해 달라고 했다. 아마도 제2저자로 R군이 들어올 것 같다. 든든한 지원자 R군도 있고 이때까지 나를 지도해 준 K상도 있고 조금만 더 힘을 내면 금방 미국에 도착해 있을 것 같았다.




 교수님의 단체 메일에는 교수님이 먼저 염두에 두었던 동기 두 명이 이런저런 문제로 참가하지 못하게 됐다고 언급되어 있었다. 그 둘은 처음부터 교수님이 맡아서 실험을 진행시켰고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교수님이 아닌 조교인 K상의 지도를 받으며 실험을 하고 있던 나는 교수님에게 보고하는 동기들을 보면서 질투심을 느꼈었다. 아무래도 나는 이 연구를 하고 싶어서 들어온 것이 아닌 오로지 학회 스펙을 목적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교수님과의 연결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교수님의 레이더 속에서 내가 사라져 미국 학회에서 멀어지는 것 같았다. 동기들과 사이가 가까워진 것과는 별개로 나는 너무나도 목적이 뚜렷했기에 자꾸만 교수님의 관심이 그 둘에게만 쏠리는 것이 나를 점점 불안하게 하였다. 그 생각은 생각을 먹어 내 정신상태를 갉아먹었다. 스트레스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치고 올라왔다. 그래서 연구실에 배정된 지 두 달쯤 됐을 때 나는 연구실을 옮기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험 결과는 점점 방향이 잡혀갔고 교수님 앞에서의 발표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잊을만하면 내 마음을 건드렸고 결국 나는 욕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폭주하였다. 무조건 내가 가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연구에 임했다. 이때까지는 R군에게도 K상에게도 웬만하면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보이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흘러나오는 본심을 숨기지 못하고 약간씩 학회 얘기를 흘렸다. 그래야만 나를 잊지 않고 생각해 줄 것 같았다. 그렇게 교수님에게 최종 보고까지 했고 학회 얘기를 꺼내신 교수님에게 당당하게 가고 싶다고 얘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정말 멤버로 발탁되었다.


 나는 축제라도 벌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연구실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수업을 듣고 연구실에 돌아왔을 때 나의 학부 동기이자 연구실 1년 선배인 석사 1학년 S양이 교수님과 미팅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내 자리에 앉아 관심 없는 척 말을 들어보니 S양도 미국학회에 가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석사생들 중에 이 학회를 노린 사람이 많았다. S양은 자신의 노트북으로 실험 결과를 교수님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교수님의 단체 메일을 받고 자신도 지원하고 싶다고 온 듯했다. 옆에는 S양과 같은 실험기기를 쓰고 함께 실험하는 K상도 있었다. 교수님은 잠깐 고민을 하더니 이번 학회에 구두 발표가 아닌 포스터 발표가 있냐고 물었다. 구두 발표와 포스터 발표의 큰 차이는 논문을 쓰냐 안 쓰냐에 있다. 구두 발표는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지만 포스터는 연구에 대한 홍보 개념에 가깝다. 교수님은 이번 학회에 포스터 전형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 친구에게는 포스터 발표를 제안했다. 그 제안을 하면서도 교수님은 또 '여자'를 언급하셨다. 어차피 이번에 여자애가 가니까 S양도 가자는 식으로 말이다.


 이야기가 마무리된 후 교수님과 S양 K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셋 다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당황했고 일본어가 제대로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셋은 무엇인가 서로 속닥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S양의 얼굴을 보았다. S양은 나에게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함께 가게 돼서 좋다는 걸 전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S양의 얼굴을 보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S양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입꼬리는 살짝 올라갔으나 눈빛은 그대로였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를 하면서 나를 살피듯 쳐다보는 셋을 마주했다. 그 순간 나는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하던 시절에도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낯설고 차가웠다.


 S양의 그 눈빛이 무엇이었을까 마음이 쓰이던 중 옆자리 동기가 말을 걸었다. 교수님의 일 순위였지만 못 가게 된 동기였다. 그는 나에게 구두 발표인지 포스터 발표인지 물었고 나는 구두 발표라고 대답했다. 동기는 그렇구나 하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S양과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런 동기에게 R군이 다가왔다. 그 둘은 못 나가게 된 사연을 얘기했고 다른 학회라도 나가보는 것이 어떠냐 내년도 있다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옆에서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남의 자리를 빼앗은 것일까. 생각지 못한 죄책감에 몸이 굳어왔다. 그리고 생각은 뒤틀려졌다. 과연 내가 못 가게 됐어도 저런 말을 해주었을까. 저 동기들이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나는 아닌 것일까. 내가 그들의 자리를 빼앗은 것일까. 이제야 S양의 눈빛도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경계의 눈빛이었다.


 집에 와서도 나는 학회 지원서에 집중할 수 없었다. 정말 기쁜 날인데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낯선 우울감이 몰려왔다.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가고 싶어서 발악했을 뿐이다. 두 동기들이 나에게 자리를 뺏겼다 생각하는 것은 상관없다. 그들이 본인들의 자격을 논하는 것은 오히려 화나는 일이다. 솔직히 이기고 싶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하기도 했으니깐 말이다. 그러나 S양을 포함한 다른 석사생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멤버를 구성할 때 그들이 고정이고 내가 거기에 포함되냐 아니냐의 문제인 줄 알았다. 포스터 발표는 논문이 아니라는 사실과 나는 내년도 있지만 석사생들은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것이 떠오른 지금은 무엇인가 잘못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아닌 동기들이 발탁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겼다. 따라서 내가 발탁되었을 때 저런 반응이 나오는 이유가 내가 학부생이어서도 후배여서도 아닌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답은 딱 하나. 내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내가 그들과 다른 카테고리 속에 있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전혀 그들의 경쟁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나를 바라보던 그들의 눈빛에 깊게 상처 입었다.


 나는 편법을 쓰지 않았다. 완벽하지 않은 외국어로 정말 간절하게 열심히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이 깊은 상처 속에서 더 깊숙이 잠겨 들었다. 어쩌면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 내가 생각한 이유가 아닐지도 모른다. 예상 못한 후배가 치고 올라오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내 입장에서 저들의 경계는 엄청난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소외감은 이방인의 소외감이었다. 어쩌면 저들에게 완전히 스며드는 것이 불가능할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친구과 갔던 인센트가게. 늦은 생일 선물을 받았었다. 처음 써본 인센트는 우울한 나를 다독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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