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우리’가 되었다
내가 2학년이 되었던 해 코로나가 터졌다. 개강이 미뤄진 4월, 하늘길은 막히기 시작했고 생소한 질병에 대한 공포심에 세상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몇 주간의 고민 끝에 학교는 전면 온라인 수업을 결정했고 유학생 친구들은 모두 한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도 한국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허락해주시지 않으셨다. 나를 강하게 키우는 아버지는 나에게 이곳에서 버티라고 지시하셨다. 약간 상처를 받은 것도 같다. 그렇게 나는 일본에 남게 되었다. 모든 수업은 온라인이었고 나의 일상은 하루종일 컴퓨터 화면을 보며 수업을 듣다가 밥을 해 먹고 운동을 다녀오는 것이었다. 하루에 한마디도 안 하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아주 가끔 남아있는 한국인 동기들과 밥을 먹기도 했다. 1학년때 굳이 같이 앉아 수업을 듣고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같이 학식을 먹곤 했었다. 이 동기들이라도 남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3학년이 되었다. 남아있던 동기들마저 모두 군대를 갔다. 여기서 남은 사람은 이미 군대를 다녀온 S오빠뿐이었다. S오빠는 나보다 4살이 많고 우리 모두에게서 최고 연장자였다. S오빠는 나와 전혀 다른 성향의 사람이다. S오빠는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자신의 여동생과 동갑인 나를 친동생같이 잊지 않고 챙겨주려 했다. 불편할 때도 많았다. 모르는 사람이 있는 술자리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기들 중에 둘만 남게 되자 S오빠와 점점 가까워졌다. S오빠는 오래 만난 일본인 여자친구가 있었고 나는 그 언니와도 매우 친해졌다. 학교 공부가 매우 힘들어진 학년이라 같이 공감할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해 여름, 오빠는 나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자신의 일본 친구들과 같이 여행을 가자는 것이었다. 아직 이렇다 할 일본인 친구가 없던 나는 그 여행이 가고 싶어 졌다. 아직 일본어도 서툴고 일본인들 사이에서 움츠러들었지만 인생 최고의 단절을 경험하며 인간이 사회적 동물임을 뼈저리게 깨달은 나는 S오빠의 제안을 감사히 받아들였다. 단체 채팅방에 초대되었고 여행계획을 짜기 위해 쉬는 날 학교에서 모이기로 했다.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S오빠와 함께 약속 장소로 향했다. 멤버는 총 7명이었다. 일본인이 3명, 중국인이 2명, 한국인이 2명인 구성이었다. 이것이 R군과 K군과의 첫 만남이었다( K군과는 1학년 조별과제 때 한번 만난 적이 있어서 엄밀히 말하면 첫 만남은 아니긴 하다.).
우리는 빈 강의실을 하나 찾아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앉자 몇 명은 노트북을 꺼냈고 누군가는 태블릿을 꺼냈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R군의 전국 전철역 지도집이었다. R군은 전철 덕후였고 컴퓨터로 검색하는 것보다 종이로 인쇄된 두꺼운 지도집으로 계획을 세우는 것을 선호했다. 어디로 여행을 갈지 이야기를 시작하자 생각지도 못한 장소가 튀어나왔다. 바로 비행기 박물관이었다. 한 친구가 제안을 했고 나는 그 모습이 매우 신선했다. 한국인들끼리 여름 여행 계획을 세운다 하면, 어디 바닷가나 계곡으로 가서 술과 고기를 먹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가. 그런 여행도 즐겁지만 이런 신선한 제안이 어딘가 순수하고 바른 느낌이었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하지만 비행기 박물관을 가고 싶지는 않았고 다른 후보지를 둘러보던 우리는 후지산 근처의 사파리 동물원을 발견했다. 동물을 매우 좋아하는 나는 동물원에 가고 싶다고 강력 어필했다. 그렇게 우리는 공대생 7명이서 사파리 동물원으로 당일치기 자동차 여행을 가기로 했다.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가는 자동차 여행이었다. 그것도 일본인 친구들이랑! 첫 수학여행을 가는 중학생 마냥 신이 나서 가족들에게도 자랑을 했었다. 코로나 시국에 딸이 혼자 지내는 것 같아 걱정하던 부모님도 좋아하시는 것 같았다. 여행 당일날 아침, 편하지만 예쁜 옷을 골라 입었다. 가볍게 화장도 했다. 우리는 렌터카 매장 앞에서 만났다. 아직 두 번째 만남이라 어색하게 인사를 했고 차에 올라탔다. 7명을 태우는 차라 매우 큰 차였고 운전 담당은 K군이었다. 음악을 틀고 도로를 달리면서 우리는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조금씩 일본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소통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조금씩 친구들이 편해졌고 즐거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우정이 생기는 것 같았다. 한참을 달려 동물원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동물원에 입장하면서 처음 제대로 R군과 대화하게 되었다. R군은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었다. 매우 다정하고 나를 배려한 적당한 속도의 말투였다. R군과 가볍게 좋아하는 동물과 음식에 관한 얘기를 했고 나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R군이 좋았다. 편안한 목소리와 그 누구도 기분 나쁘게 하지 않는 대화들이 좋았다. R군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비슷했다. 이 친구들과 있는 내 모습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동심으로 돌아가 동물원을 구경하고 우리는 근처 대형 아웃렛으로 향했다. 몇 년 전에 한번 와 본 적이 있는 아웃렛이었다. 후지산이 커다랗게 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날씨가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해지는 노을과 촉촉한 비냄새와 약간의 바람이 오히려 그날의 분위기를 더욱 인상 깊게 만들어주었다. 이 여행을 계기로 나는 이 친구들 무리에 끼게 되었다. 이 친구들과 지금도 매년 여행을 다니고 있다. 특히 R군과는 같은 연구실에 들어가게 돼서 매우 특별한 친구가 되었다. 표면상의 외국인 친구가 아니라 국적과 언어를 뛰어넘은 진짜 친구 말이다. 이것 또한 나에게는 큰 발전이고 성장이었다. 나는 이 친구들이 정말 소중하다. 졸업 직전 나의 대학시절을 비로소 청춘으로 기록해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