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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즈 Jul 07. 2023

일본 공대의 대학원 입시 (1)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일본에서는 대학원에 진학하려면 본고사를 치러야 한다. 여기서 본고사를 치르지 않고 자대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는 전형이 있는데, 이를 '내부진학'이라고 한다. 한편, 타대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다른 학교에서 지원하는 학생들과 똑같이 본고사를 치르고 들어오는 전형을 '외부 진학'이라고 한다. 우리 학교의 대학원 내부진학 조건을 설명하자면 일단 연구실에 배정된 학생들 중에서 성적 상위 70% 안에 들어야 한다. 4학년 진급에는 성공했으나 성적 상위 70% 안에 들지 못했다면 내부진학이 불가능하다. 4학년 진급률이 60% 정도 되니까 성적이 상위 약 40% 정도 들어야 되는 것이다. 이 조건은 모집 요강에 명시되어 있으나 연구실 배정 과정을 생각하면 인기 없는 연구실을 고를 경우 성적이 하위권이라 하더라도 내부진학이 가능해진다. 물론 대학원 진학이 목표가 아니라 취업이 목적이라면 4학년 진급만 했다면 본인이 몇 등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참고로 일본은 회사에서 지원자의 성적을 보지 않는다. 아예 성적증명서조차 제출하지 않는다).




 내부진학의 치명적인 함정은 일종의 '내정'이라는 것이다. 대학 측에 자대 대학원에 진학할 것임을 약속하는 것이다. 우리 학교보다 상위권 대학의 대학원은 도쿄의 단 두 곳뿐인 도쿄대와 도쿄공업대(*한국으로 치면 포항공대)이다. 이 두 곳에 외부진학 원서접수는 8월에서 9월이고 우리 학교의 내부진학 원서접수는 6월이다. 내부진학은 암묵적으로 원서 접수와 동시에 합격이기 때문에 내부진학 원서를 넣는다는 것은 외부진학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일종의 '수시 납치'인 셈이다. 이러한 방식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성적 최하위권인 가챠조(*랜덤조)가 도쿄대나 도쿄공업대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보통의 학생들은 4대 역학과 영어를 보는 본고사 공부가 부담이 되어 내부진학을 선택한다. 그러나 강제로 선택권이 없어진 가챠조 학생들은 필사적으로 본고사 공부를 하게 되고 국립대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는 것이다(심지어 우리 학교 본고사는 떨어지고 도쿄대에 붙은 사례도 있다). 아무튼 사립 대학인 우리 학교에 비해 매우 싼 등록금과 도쿄대라는 네임밸류가 탐이 났지만 본고사를 보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나는 내부 진학을 선택했다. 그리고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일본에서는 자대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진학한 경우를 좋게 보지 않는다고 한다. 문제가 있는 학생이라는 편견이 생긴다나... 이해할 수 없는 문화이다.


 우리 학과는 내부진학 때도 시험을 봐야 한다. 1교시는 소논문 시험이고 2교시는 면접이다. 다른 과의 경우 소논문 없이 면접만 있는데 우리 과만 소논문이 있다. 다른 과보다 4학년 진급 과정이 어려운데 왜 이러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K군 또한 나와 같이 올해 내부진학 시험을 보게 되었다. 우리는 올해 소논문 시험의 주제를 미리 예측해 보았다. 나는 몇 년에 걸쳐 나왔던 SDGs(*지속 가능한 발전)가 올해도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K군은 올해부터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Chat GPT가 나올 것 같다고 했다. 프로그래밍 쪽 연구를 하고 있고 프로그래밍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K군의 의견이라 개인의 취향이 너무 반영된 예측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과는 기계공학과이고 Chat GPT는 정보공학과 쪽에 가깝지 않은가. 프로그래밍에 별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나는 끝까지 SDGs가 나올 것을 믿었다. 입시 시즌이 미국학회 준비로 매우 바쁜 시기여서 따로 입시 준비를 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정말 오랜만에 컴퓨터가 아닌 손으로 글을 쓰려니 한자가 걱정이 되어서 시험 전날밤 SDGs주제에 맞춰서 간단하게 연습을 해 보았다. 특히 環境(*환경) 한자를 열심히 외워갔다.


 시험 당일이 되었다. 시험은 토요일 오전이었다. 같은 날 면접도 보기 때문에 일본 문화상 정장을 입어야 했다. 투피스를 모두 입을까 했지만 치마를 입고 소논문 시험을 보기 불편할 것 같아서 하의는 평소에 입고 다니는 정핏 슬랙스를 입었다. 재킷과 색이 약간 다르지만 거의 티가 나지 않았다. 출석만 한다면 합격인 면접이니 부담감이 없어서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1교시 소논문 시험이 시작되었다. 시험지가 책상에 뒤집혀 놓였고 교수님의 지시 전까지는 뒤집어보면 안 됐다. 그러나 뒤집혀있는 시험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낯익은 영어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Chat GPT'... 머리속이 새하예졌다. 시험이 시작되고 시험지를 뒤집어보다 글자 제한도 작년의 두 배정도인 800-1200자였다. 망했다... 나는 정말 프로그래밍엔 관심이 없고 AI에 관해서는 정말 아는 것이 없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은 단 60분이었고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주제는 'AI로 인한 기계산업 현장의 자동화로 인한 기계 설계 및 개발에 생기는 변화와 이를 위해 대학원생이 익혀야 할 자질'이었다. 전문적으로 아는 것은 없으니 일단 청소년의 시각과 비전공자의 시각에서의 AI에 대한 이미지와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알게 되 AI와의 차이점을 서술하고 그 차이점을 바탕으로 AI가 아닌 사람에게 요구되는 본질적인 능력과 이를 위해 대학원생이 해야 될 노력으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상보다 많은 글자수가 부담이 되어서 앞부분에서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있었던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까지 기억을 끌어모아서 서술했다.


 서론을 적고 나니 이미 700자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본론을 쓸 때가 됐다. 나는 AI가 아닌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은 'Originality 오리지널리티'라고 적었다. 어려운 계산과 단순 반복 작업은 모두 자동화된 AI가 하는 것이 더 빠르고 효율적이다. 그러나 AI는 결국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정보를 학습한 결과 즉 딥 러닝의 결과이기에 독창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모든 설계와 개발 공정 과정의 첫 부분에서 독창성을 발휘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고 인간이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대학원에 진학하면 여러 실험과 설계 과정을 적극적으로 직접 경험함으로써 본인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적었다. 그래야 본인만의 노하우가 쌓여서 본인만의 독창적인 방식과 아이디어가 탄생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나와있는 남들이 아는 것은 기계가 하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이렇게 적고 나니 1100자를 넘었다. 아마 한자가 기억이 나지 않아 히라가나로 표기한 단어를 압축하고 나면 1000자를 조금 넘을 듯싶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한 분량이라고 생각했다. 주어진 시간이 끝나고 주위를 살짝 둘러보니 내 꽤 분량이 긴 편인 듯했다. 대학원 입시 시험의 첫 난관을 무사히 끝마쳤다.



아주 가끔 싸가는 점심 도시락. 도시락 통과 주머니 모두 100엔 샵에서 구매했는데 귀여워서 만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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