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자고!
K군은 우리 과에서 가장 소문이 많은 로봇 연구실에 들어갔다. 기업처럼 학생들을 굴리는 걸로 유명하고 교수님이 한 성격 하는 탓에 모두가 기피하는 그 로봇 연구실 말이다. K군이 로봇 연구실로 배정받았을 때 나는 처음부터 조금 걱정이 되었다. K군은 똑똑하지만 자신이 원하지 않는 공부나 작업은 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반대로 본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하고 싶다고 느끼는 일은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주며 몰두하고 최고의 성과를 얻어낸다. 말하자면 자신의 고집이 있는 스타일이인 것이다. 경험상 로봇 연구실 교수님 같은 분을 대할 때는 융통성이 필요하다. 왜 이렇게까지 뭐라 그러는지 모르겠어도 일단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야 된다. 그 자리에서 변명을 하던가 반박을 한다면 교수님의 화를 돋워서 큰 싸움이 되는 것이다. 교수님의 앞에서는 'yes 맨'이 된 후 나와서 연구실 사람들과 다 같이 교수님 욕을 하는 것이 오히려 정신건강에 좋을 것이다. 하지만 친구로서 K군의 성격을 생각해 본다면 본인이 'no'라고 생각하는 일을 'yes'라고 대답하고 넘어갈 수 없는 친구이다. 아무리 지도 교수님일지라도 본인이 부당하다고 여기는 규정은 알아서 어길 성격이었다. 그래서 K군이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그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꽤나 엄청난 현실이 되었다.
K군은 결국 교수님에게서 퇴학 권고를 받고 말았다. K군은 연구 말고도 본인이 하고 있는 작은 사업이 있었고 이를 양립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로봇 연구실 교수님은 학생들이 항상 당신이 찾을 때 그 자리에 있길 바라는 사람이지만 K군은 두 일을 양립하기 위해서 연구실에서 일찍 나갈 수밖에 없었다. 연구 진행상황이 교수님이 원하는 만큼 좋았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안타깝게도 K군의 프로젝트는 교수님의 기대에 한참 뒤처졌다. 그래서 3개월을 거쳐서 몇 번의 주의가 있었고 결국 갈등은 극에 달해 교수님은 K군에게 자퇴 권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K군은 K군대로 정신적 스트레스로 더 이상 로봇 연구실에서 견딜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학과에 고발하여 다른 연구실로 이동하려 했지만 올해부터 바뀐 규정상 내부 진학으로는 연구실을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미 외부 입시는 늦은 상황이어서 K군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대학원에 가고 싶다면 로봇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로봇 교수님이 K군을 받아주지 않겠다고 한 마음을 바꾸셔야 그마저도 가능한 것이었다.
소논문 시험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나는 K군과 점심을 먹으러 학교 식당으로 향했다. 예상 못한 주제를 생각보다 잘 써낸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점심을 먹으면서 마침 궁금했던 K군의 상황을 물었다. 나에게는 K군이 절대 그 로봇연구실에서는 연구를 할 수 없다고 말한 게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교수님도 K군을 내부 진학으로 받아줄 수 없다고 말한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두 변수 모두 K군이 내부 진학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오늘 내부 진학 시험에 와있으니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했다. K군은 일단 로봇 연구실이라도 진학을 하고 싶다고 했다. 대학 졸업장만 있다면 대학원은 중간에 그만두더라도 할 일은 많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로봇 교수님의 입장이 저렇게 완고한데 그게 가능하려나 걱정이 되었다.
5년 만에 면접을 보려니 일본 면접 예절이 기억이 나질 않았다. 급하게 K군에게 특강을 들었다. 먼저 들어가기 전에 노크를 하고 "失礼します (*실례합니다)"를 하고 들어간 후 의자 옆에 서야 한다. 여기서 포인트는 절대 면접관이 앉으라고 하기 전에 의자에 앉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면접관이 의자에 앉으라고 하면 다시 "失礼します (*실례합니다)"를 한 후 의자에 앉으면 된다. 나갈 때도 똑같이 "失礼します (*실례합니다)"를 한 후 문을 열고 나가면 된다. 대학교 입시 때 일본어 학교에서 엄하게 배운 내용이다. 합격이 보장되어 있고 유년생들에게는 친절한 교수님들이 면접관으로 배정된다는 얘기들을 들었기에 간단하게 복기를 한 후 면접 대기실로 돌아왔다.
면접은 수험번호순으로 3개의 교실로 나뉘어서 보게 됐다. 수험번호는 학적번호 순이여서 학번이 빠른 유년생들은 모두 같은 교실에서 면접을 보게 됐다. 나는 꽤나 앞번호여서 다른 유년생들보다 먼저 면접을 보게 되었다. 전혀 긴장을 하고 있지 않았는데 막상 코앞으로 차례가 다가오니 갑자기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 앞에 서는 것은 아직 떨리는 모양이다. 정말 간단한 면접이라는 선배들의 말을 되네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내 수험번호가 불리고 면접 대기실을 나가, 면접 교실 문 옆에 대기 의자에 앉았다.
대기 의자 옆 창문으로 면접관의 모습이 보였다. 앞부터 한 명 한 명 살펴보는데 제일 끝에 정말 예상치 못한 인물이 앉아있었다. 로봇 교수님이었다. 저분이 왜 여기에 있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분은 역시 예상대로 친절한 교수님들이었다. 유년생 면접관으로 들어올 분이 아닌데 왜 여기에 계신 건지 갑자기 긴장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로봇교수님은 나를 알고 계신다. 머슬 슈트를 하고 싶다고 어필했는데 저 연구실이 아닌 지금의 연구실에 왔다는 걸 말이다. 면접 때 곤란한 질문을 하기 딱 좋은 타깃이었다. 급하게 머릿속으로 대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로봇이 아닌 지금의 연구실을 오게 된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내 차례가 되었다. 노크를 하고 "失礼します (*실례합니다)"를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교수님들 모두 당황하시며 한 분이 아직 안된다고 소리치셨다. 면접관이 말하기 전에 의자에 앉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순간 까먹은 것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고 교수님들은 이런 예상 못한 상황이 웃기신 듯했다. 수험번호와 이름을 말하고 교수님의 지시로 의자에 앉았다. 다행히 분위기는 나빠지지 않았다. 기본적인 질문이 오가고 나의 소논문에 대한 칭찬이 들어왔다. 한 교수님은 내가 쓴 글이 교수님의 출제 의도와는 사뭇 다르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교수님이 너무 잘 썼다고 여러 번 얘기하시며 다만 일본어 표현이 조금 어색한 것이 있으니 그것만 공부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생각지도 못한 극찬에 기분이 좋아졌고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면접 내내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참고로 모든 학생들에게 공통적으로 하는 질문 중에 학비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이 있는데 유학생은 그저 여유 있는 표정으로 부자인척 하면 아무런 의심 없이 넘어간다. 유학생은 모두 부자라는 편견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된다.
로봇 교수님은 면접이 끝날 때까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아는 척을 안 해주시니 오히려 서운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태도를 보니 이 교수님이 K군을 위해 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부 진학을 시켜주고 싶지 않았지만 학과장 교수님의 노력으로 아마 직접 면접을 통해 주의를 주고 열심히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조건으로 내부진학을 시켜주는 것으로 결론을 낸 것 같았다. 끝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면접이 끝났고 면접실 밖으로 나왔다. 소논문에 대한 칭찬도 들었고 아무 준비 없이도 일본어 면접이 가능했던 것이 뿌듯했다.
얼마 전 대학원 합격 소식을 전달받았다. K군 또한 합격이었다. 합격자 명단을 보니 역시 수험생 전원이 합격이었다. 그렇다 쳐도 K군이 합격을 해서 다행이었다. K군의 면접은 역시 압박 면접이었다고 한다. 다행히 면접에서는 K군이 이때까지 죄송하고 열심히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나도 앞으로 2년 반동안 연구실에서 버틸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갑갑한데 K군은 오죽할까 싶다. 그래도 둘 다 힘내서 꼭 같이 졸업하고 싶다. 우리 둘 다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