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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즈 Jul 14. 2023

유학길에 오르기 전에 생각해 보아야 할 것

떠날 때는 알지 못했던 유학의 의미

 나에게는 특별한 친구들이 있다. 바로 일본어학교 동기들이다. 나는 일본에 와서 2년을 일본어학교에서 공부하였고 그중 첫 해를 보낸 어학교 친구들이다. 우리는 같은 나이의 한국인 여학생들로 나포함 4명이다. 흔히 고등학교 친구가 평생을 간다고 하지 않는가. 나에게는 이 친구들이 그런 친구들이다. 대학 친구들하고는 또 다른 느낌이라고나 할까. 학교를 졸업하고 서로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더라도 끊기지 않을 것 같은 인연. 일 년에 한 번 만나도 어색하지 않고 여전히 반가운 그런 친구. 실제로 일본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각지의 대학으로 뿔뿔이 흩어졌지만 꾸준히 연락을 하였고 서로에게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로 인연을 이어왔다. 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한국으로 돌아간 여러 지인들을 생각하면 우리 4명 모두 일본에 남아있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어학교 친구가 왜 이렇게 특별한지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일본어를 한마디도 못하던 시절,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던 막막한 우리의 스무 살을 함께 이겨낸 '전우애' 같은 감정 때문인 것 같다. 올해는 4년 만에 우리 모두가 도쿄와 수도권에서 살게 된 의미 있는 해이다. 다 같이 모여서 술을 진탕 먹으며 옛날이야기를 하니 유학을 온 첫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능이 끝났다. 국어가 끝나고 나선 아무런 기억이 없다. 모든 수시에 최저등급이 있던 나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결과는 처참했고 나는 모든 의지를 놓아버렸다. 재수를 하고 싶었다. 도저히 자존심이 상해서 정시로 붙은 대학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와 뜻이 맞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투자를 하면서도 항상 의심이 있으셨다. 결과가 좋지 못하자 그 의심은 분노가 되었고 나에 대한 모든 기대를 놓으셨다. 내 수능에 더 이상의 지원은 없다 하셨다. 나 스스로도 무너져있는 상태였기에 싸워낼 기운도 없었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그저 시간이 흐르는 대로 그렇게 있었다. 그 모습을 손 놓고 지켜볼 수만은 없던 엄마가 일본 유학이라는 새로운 길을 제안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제안이었다.


 일본어 한마디 못하는 내가 아무 연고 없는 일본 유학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無무'에서 시작하고 싶었다. 자존심이 티끌도 남지 않을 만큼 상했었다. 그 누구를 만나기도 두려웠다. 가족조차 얼굴을 보기 힘들어서 방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엄마에게 일본유학에 가겠다고 결심을 말했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싹 쓸어버리고 다시 쌓아 올리고 싶었다. 엄마는 출국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를 붙잡고 싶어 했다. 나 또한 마지막까지 흔들렸었다. 하지만 그 욕망이 더 컸다. 다시 쌓아 올리고자 하는 욕망이 말이다. 그렇게 뭐라고 쓰여있는지 읽지도 못하는 비자 관련 서류를 파일에 끼워 꼭 안고 출국 비행기에 올랐다. 스무살이었기에 가능했던 용기였다.


 일본 유학이 결정 나고 주변 반응은 정말 뜻 밖이었다. 나쁜 말 투성이었다. 걱정을 빙자한 저주에 가까웠다. 가족조차도 말이다. 아마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나보고 비뚤어진 거라고 할 것이다. 나도 그런 거면 좋겠다. 내 인생에서 인간에게 받은 상처는 저때가 최고치였다. 그것들이 그저 허상이라면 그 누구보다 내가 좋아할 일이다. 도피유학을 시작으로 학력세탁, 재외국민 전형 편입을 노린 거라는 둥 등등 나는 언급한 적도 없는,  전혀 욕먹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욕하는 사람 투성이었다. 가장 상처받은 말은 친구 어머니에게서 들은 소리였다. 내 친구에게 그랬다고 한다. 한국 대학도 못 간 애랑 뭐 하러 친구 하냐고. 이런 말들이 오히려 떠나는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더더욱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게 만들었다. 내 목표는 단 하나였다. 명문대 입학. 처음부터 대학만을 위한 발걸음이었다. 말 그대로 '유학'길이었다.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 유학원에서 상담받을 때 들었던 얘기는 나 정도면 웬만한 사립대는 쉽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노력한다면 국립대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진단이었다. 그리하여 호기롭게 유학길에 올랐지만 역시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그래도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보장된 것이 없는 그 길을 어떻게 그렇게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었는지 신기하다. 마치 눈가리개를 씌워둔 경주마 마냥 앞만 보고 달렸다. 아버지의 끝없는 불신에도 묵묵히 달려 내 실력을 입증하고 당당히 명문대 합격증을 얻어냈다(여담으로 아버지는 내가 유학 간 사실이 창피해서 주변사람에게 비밀로 했는데 내가 대학에 간 이후로는 여기저기 자랑하신다고 한다. 좋아하시는 모습이 뿌듯하긴 하지만 그전에 창피해했다는 사실이 많이 씁쓸하다).


 대학에 들어왔는데 입시 시절보다 더 힘들었다. 정말 거짓말 안 하고 절대 대학생 시절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요즘 가장 무서운 말이 회사에 들어가면 학생 때가 그리울 거라는 말이다. 대학 때보다 더 힘들다면 견뎌낼 자신이 없다. 그래도 힘들었던 만큼 유학은 내 인생에 있어서 엄청난 자양분이 되었다. 유학 생활로 얻은 가장 큰 가치는 위기 대처 능력인 것 같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위기를 극복하고 헤쳐나갈 자주력과 순발력이 살아남기 위해서 축적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또 하나는 나를 내려놓을 용기이다. 유학길에 오른 순간 외국인으로 살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모든 이들에게 한 수 접고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딜 가도 나는 바보가 된 기분이다. 이 생각에 매몰되면 빠져나오기 정말 힘들다. 이걸 못 견디고 귀국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래 나 바보다! 어쩔래!'라는 마인드로 다 내려놓고 끈질기게 쫓아가다 보면 어떻게든 나의 위치가 만들어진다. 나도 내 친구들도 이렇게 살아남았다.


 그렇게 살아남고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소속과 위치가 생기고 나면 '완벽한 이방인'이 된다. 여기서 내가 표현한 '완벽한 이방인'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양쪽 모두에서의 이방인이라는 의미에서 '완벽한 이방인'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의 목표는 대학이었다. 나에게 유학은 말 그대로 공부하러 오는 길이었다. 하지만 유학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오면 학력을 포함한 나의 대한 모든 평가가 일본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특히 우리 학교같이 국제성이 다소 떨어지는 학교는 일본 안에서와 일본 밖에서의 평가가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내가 쌓은 나의 전문성은 일본에 맞춰져 있고 내 생각 또한 일본인들과 비슷해진다. 그리고 이런 나를 한국에서 좋아하지 않는다. 생각보다 한국은 유학생을 반기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유학을 결심하는 만큼의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다. 잃을 것이 없어서 떠나온 길이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을 각오를 하고 돌아가야 하는 거니까. 유학을 온다는 것은 나의 인생을 옮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단 떠나는 순간 돌아갈 곳은 없다. 유학이 이런 의미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돌아갈 곳이 없어 일본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고 살아왔다. 그런데 연구실에 들어오고 약간의 마음의 변화가 생겼다. 여전히 학교이지만 기업의 형태를 갖고 있는 연구실 생활은 또 다른 세계였다. 이제부터는 Input(*인풋)이 아닌 Output(*아웃풋)이다. '바보'로 사는 게 학생 때는 많은 공부가 된다. 역경을 이겨냄으로써 얻는 것들이 있으니깐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내 능력을 펼쳐야 할 때이다. 몇 년을 기다려왔는데 언어의 벽으로 내 능력의 6-70% 밖에 펼치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상상이 되는가. 분명 나는 더 잘할 수 있는데 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그래서 요즘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물론 일본보다 더 낮은 급여와 더 낮은 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꾸준히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알아봐 줄 거라고 믿고 싶다. 어학교 친구들에게 이런 내 생각을 얘기했을 때 친구들은 하나같이 아깝다고만 했다. 하지만 술을 진탕 마신 그날 직장을 다니고 있는 친구가 입을 열었다. 취중진담을 하겠다면서 말이다.


"갈 수 있을 때 가"

"너 한국 가는 게 싫어서 가지 말라 했는데 가는 게 맞는 것 같아"

"나도 바보 그만하고 싶어..."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직 내가 나중에 어디서 살고 있을지 잘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나도 같은 심정이다. 바보 그만하고 싶다.


일본에 온 지 한 달쯤 됐을 때 오다이바 해변에서  마신 캔맥주. 꽤나 낭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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