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한 발
한 학기가 끝날 때마다 우리 연구실에서는 '中間発表(*중간발표)'라는 것을 한다. 보통 졸업을 앞둔 학부 4학년과 석사 2학년이 발표를 하게 된다. 저번 영어 논문 발표와 마찬가지로 교수님이 참석하는 전체 회의에서 발표하는 것이다. 발표 내용은 한 학기 동안 해온 연구의 종합적인 보고라고 생각하면 된다. 나에게 있어서 이번 중간발표는 큰 의미였다. 미국 학회에 나가는 멤버로 선발되고 나서 일어났던 파동을 생각하면 잘 해내야만 했다. 교수님에게도 연구실 사람들에게도 내가 나가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보여주어야만 했으니까. 완벽하게 발표를 마치고 모두의 앞에서 교수님에게 인정받고 당당하게 학회에 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방학을 핑계로 한국에 3주 동안 머물기 위해 이미 비행기표를 끊어놓은 상황이어서 어느 정도 연구가 진행됐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힘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한 학기의 마무리를 완벽하게 하고 한국으로 뜨기 위해 마지막으로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2주간의 과정은 정말이지 계획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도미노가 무너지듯이 내가 쓰는 실험 기기와 측정 장치들이 차례차례 고장 나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내 코앞에서 거대한 도미노가 나를 덮쳐올 것 만 같았다. 정신줄을 붙잡으며 임시 수리를 마친 직후에 사용 예약을 꾸역꾸역 넣어서 겨우겨우 실험 결과의 경향성을 주장할 수 있을 만큼의 실험 데이터를 모으는 데 성공했다. 원래 계획했던 새로운 조건에서의 실험은 결국 하지 못했다.
그래도 실험을 마치고 나니 재미있는 점이 발견되었다. 예상밖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처음에는 당황하고 눈앞이 캄캄했다. 이미 생각해 놓은 고찰이 있는데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을 전환시켜 보았다. 결과를 토대로 고찰을 생각하는 것이 원래의 방법이지 않은가. 번뜩 모든 실험결과에 맞아떨어지는 원인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급하게 샘플의 표면 원소 분석을 진행했다. 이 분석기는 기숙사에서 한 시간 넘게 가야 되는 지방 캠퍼스에 있고 검사 시간도 오래 걸려서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달려가야만 했다. 만약 분석 결과, 내가 원하는 원소가 발견된다면 내 연구를 마무리할 마지막 한 조각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검사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새롭게 새운 가설에 딱 들어맞는 원소가 발견되었다. 신이 났다. 교수님에게 당당히 보여드릴 만한 것이 생겼다. 장비를 쓸 수 있는 차례가 밀려서 검사 결과가 나왔을 때, 발표까지 며칠 남아있지 않았다. 부지런히 발표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신이 났다. 얼른 연구실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어떤 반응을 해줄까? 교수님은 무슨 말을 해주실까? 시간은 바쁘게 흘러 발표 당일이 되었고 주인에게 칭찬받고 싶은 강아지처럼 웃는 얼굴로 발표를 시작했다.
이미 며칠 전 선배들과의 리허설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었다. 그래서 거기에 좀 더 수정도 하고 보안도 했기에 저번 영어논문 발표 보다도 훨씬 차분하고 자신 있는 목소리로 발표를 끝마칠 수 있었다. 지난 몇 달간의 노력이 저 ppt안에 담겨있었다. 비장한 각오로 시작한 연구실에서의 첫 학기였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냈다. 이제 교수님의 코멘트만이 남았다. 마지막 한 발만이 남았다.
내가 발표를 끝마치자 교수님은 잠시 생각을 하시더니 옆자리의 기술 자문 연구원분께 나의 고찰에 대한 신빙성을 물었다. 연구원분은 한 조건을 제시하시며 만약 그 조건에 충족한다면 가능한 얘기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그 조건을 충족시키는지 확인하기 위한 검사를 진행하는 걸로 내 연구에 대한 피드백은 끝이 났다. 아무런 결과를 못 낸 다른 동기들에 비해 나름대로 잘 만들어왔다고 생각한 것에 반해 교수님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가 마무리될 때쯤 교수님이 미국학회는 어느 내용까지 발표할 생각이냐고 물으셨다. 내가 대답을 하려는 찰나 교수님이 말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포스터 발표니까 지금까지 내용으로도 충분하겠다."
...? 포스터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구두 발표를 하기로 교수님과 얘기가 되어있었고 이미 학회에 어플라이도 마친 상태였다. 당황한 나는 얼른 교수님께 나는 구두발표를 하기로 했었고 포스터에 관한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이다. 교수님은 나보다 더 당황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뭐라고? 포스터가 아니라 구두 발표로 넣었다고? 이걸로 구두 발표를 넣었단 말이야? 떨어지면 어쩌려고? 일단 구둣발표면 내용이 좀 부족하겠네. 조건 추가해서 실험 진행하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구두 발표를 하기로 정할 당시 회의실에 함께 있었던 선배들에게 나도 모르게 고개가 휙 돌아갔지만 이 상황에 그들을 끌어들이는 게 민폐인 것 같아 그만두었다. 전체 회의인 만큼 미국 학회에 가고 싶어 했던 동기들과 나의 미국행이 정해졌을 당시 씁쓸한 반응을 보였던 S양까지 있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내 미국행의 타당성을 증명하고 싶었다. 오히려 반대의 상황이 되어 버렸다. 수치스러웠다. 교수님의 인정도 안 받고 나 혼자 설레발치면서 구두 발표를 준비한 애가 된 꼴이니까. 그렇게 쉼 없이 달려온 이번학기의 피날레는 채 불도 붙여보지 못하고 식어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열심히 했으니까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열심히 한 만큼 부끄러웠다. 그저 얼른 한국으로 날아가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