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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즈 Sep 08. 2023

슬기로운 유학생활

일본에서 찾은 인생 취미

 다들 어릴 때 동경했던 스포츠나 예술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피겨가 그러했다. 2010년 겨울, 나는 캐나다 밴쿠버로 몇 달간의 어학연수를 갔다. 내가 다녔던 학교에서는 매주 화요일에 지역 내 아이스링크장에서 스케이트 수업이 있었다. 아이스하키를 가르쳐주었는데 너무 재밌어서 일주일 중에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마침 그 해 겨울은 밴쿠버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리고 있었다. 김연아 선수의 경기가 있는 날은 학교에서 수업을 쉬고 기숙사로 간식을 넣어주었다. 친구들과 기숙사 라운지 브라운관 앞에 모여서 열심히 김연아 선수를 응원했었다. 그때 본 김연아 선수는 너무나도 멋있었다. 발레와 비슷하게 예쁜 옷을 입고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지만 발레와는 다르게 좀 더 힘 있고 위험해 보이는 것이 스포츠로서의 짜릿함이 묻어있었다. 그때 한창 김연아 선수에게 빠져서 자습시간에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공책에 김연아선수를 그리고 내 맘대로 의상을 디자인하고 놀았던 추억이 있다. 그때부터 피겨를 배우고 싶었지만 애기 때부터 선수를 목표로 시작하는 엘리트스포츠라는 느낌이 강해서 배워볼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했던 것 같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피겨는 그저 로망으로 남아 어릴 때 피겨를 했다는 친구가 있으면 부러워하기만 했다.  




 일본으로 유학을 왔고 대학교 3학년이 되었다. 나는 유*브에서 우연히 본 한 일본 남자 피겨스케이팅 선수에게 푹 빠져있었다. 이 선수에게 빠진 이후로는 피겨 경기를 챙겨보고 룰도 공부하고 피겨 기술들을 인터넷에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때 번뜩 여긴 일본이고 어쩌면 피겨를 배워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은 피겨 강국이니까. 인터넷을 뒤져보니 집에서 한 시간 거리의 아이스링크장에서 피겨 교실을 열고 있었다. 비용은 두 달에 3만 엔(*약 30만 원) 정도로 꽤 비쌌다. 교통비까지 생각하면 한 달에 20만 원씩 나가는 꼴이었다. 비용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일단 수요일 오후시간으로 대기를 걸어놓았다. 대기가 꽤 긴 모양이었고 내 차례가 돌아오려면 멀지 않을까 생각했다. 웹사이트를 발견하고 안내문을 읽는 동안 충분히 설렜으니 그걸로 됐다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공부가 너무 힘들었어서 잠시나마 동경하던 피겨를 배우는 상상으로 현실도피를 했던 것 같다. 곧 4학년으로의 진급이 달린 일생일대의 시험이 다가왔고 대기를 넣어놨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은 채 시험공부에 몰두했다


  시험을 망쳤고 나는 유년이 결정되었다. 들을 수업도 없는데 일 년을 더 다닐 생각을 하니 다음학기가 굉장히 여유로워 보였다. 때마침 몇 달 전 대기를 걸어놨던 피겨교실에서 내 순번이 돌아왔다. 타이밍 좋게 평일에 비는 시간도 생기니 피겨를 정말 다녀보기로 결심했다. 유년을 하고 나니 뭔가 안 하던 짓을 하고 싶었다. 변화를 싫어하고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는 나에게는 꽤나 큰맘 먹고 도전하는 것이었다. 기가 잔뜩 죽은 마음을 이끌고 이거라도 해보자 하는 심정으로 아이스링크장으로 가서 등록을 했다. 졸업까지의 시간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아이스링크 근처에서 눈을 반만 뜨고 먹었던 햄버거 맛이 기억이 난다. 그 와중에 동네에는 없는 버*킹이 있다고 바로 들어간 게 좀 웃기다.


  피겨 교실 첫 수업날, 오래간만에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전철에 올라탔다. 어릴 때 멋있어 보였던 선수들의 연습복을 생각하며 아*존에서 방수가 되는 레깅스도 사서 챙겼다. 전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한 시간을 가야 되는 거리었지만 힘들지 않았다. 꽤 설렜나 보다.


 링크장에 도착해서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대여한 스케이트를 들고 쭈뼛쭈뼛 수강자 대기 장소로 향했다. 평일 낮시간대라 그런지 아주머니들이 대부분이었다. 서로 반갑게 인사하는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눈치만 보며 벤치에 앉아있었다. 반짝반짝 하얀 아주머니들의 개인 스케이트를 보니 새까만 내 대여 스케이트가 못생겨 보였다. 그렇지만 괜찮았다. 즐거우면 그만이니까. 스케이트를 배워본 적도 있고 자신 있었다.


 첫 수업이 끝나고 나는 링크장을 나와 달렸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뛰었다. 새롭게 태어난 기분이었다. 수업은 정말 재밌었다. 차가운 공기와 따뜻한 장갑의 촉감이 기분 좋았다. 휴대폰을 멀리 캐비닛에 넣어두고 얼음 위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오직 내 몸에 집중하며 몇 시간을 몰입하고 나니 시끄러웠던 머릿속은 깨끗해졌다. 스케이트를 신고 빠르게 얼음을 가르는 그 느낌이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가슴이 뻥 뚫렸다. 그날의 기분이 지금도 생생하다.


 첫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자마자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스케이트를 구매했다. 다른 아주머니들이 갖고 있는 것만큼 비싸고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새것이 아니어도 좋았다. 바닥에 놓아둔 스케이트를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이렇다 할 취미가 없던 나에게 인생 취미가 생긴 것이다. 피겨는 내 유년생활을 함께해 주었다. 일주일에 4시간은 꼭 스케이트를 탔다. 절대 못할 것 같았던 동작들을 넘어질 것 같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하나하나 해냈을 때의 쾌감이 너덜너덜해진 내 성취욕구를 채워주었다. 공부와 전혀 관련 없는 활동이지만 이런 작은 성취의 기억들이 쌓이고 쌓여서 자신감이 되었고 다른 무엇인가를 할 때도 더 자신 있게 도전할 수 있었다.


 같은 반 아주머니들하고도 친해지면서 일본 사회에 녹아들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학교를 벗어난 새로운 사회 네트워크가 생기니 말이다. 피겨를 배울 수 있는 인프라가 잘 되어있는 일본이어서 시작할 수 있는 취미였다. 어러 모로 피겨를 시작하고 일본에 좀 더 정이 들었던 것 같다.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만 즐기는 것이 또 하나 생겼으니 말이다.


 연구실로 바쁜 지금은 피겨를 못 다니고 있다. 그렇지만 언제든 다시 가서 탈 수 있다. 잘할 필요는 없다. 그저 즐기면 된다. 사는 게 힘들고 무기력해질 때 다시 빙판을 찾아갈 거다. 취미란 그런 거니까.


아침에 눈을 뜨고 옆으로 누우면 바로 보이는 곳에 두었던 내 스케이트.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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