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에서의 3년 차이란?
3월, 연구실 신입생 환영회는 마쳤지만 아직 정식 졸업도 개강도 아니어서 졸업하는 기수와 들어가는 기수가 모두 섞여있는 시즌이었다. 나는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하에 그때부터 매일같이 연구실에 출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교수님의 눈에 띄어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한 기업의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 회의는 나와 함께 교수님에게 잡혀온 동기 한 명과 석사 1학년 2명과 이제 졸업해서 나가는 H선배가 있었다. H선배는 연구실 배정이 있기 전 연구실 견학을 왔을 때 나를 구경시켜 준 선배였다. 연구실의 여러 가지 기계들을 소개해주면서 자기는 자동차 메이커에 붙었다며 이제 곧 졸업을 앞두고 있다고 했었다. 그는 키가 작고 작은 체구를 가졌지만 길고 통 넓은 바지와 오버핏의 재킷 등 꽤나 스타일에 신경을 쓴 듯한 외향을 하고 있었다. 나 또한 자동차 메이커에 관심이 있었고 이미 졸업해서 입사한다는 말에 부러웠던 기억이 있다.
내가 연구실에 들어갈 때는 이미 졸업해서 없을 테니 아무런 접점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같은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 공동연구는 H선배 담당이었던 듯했다. 회의 과정은 H선배의 그동안의 실험 결과를 보고하고 기업 사람들과 의견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H선배는 처음 회의에 들어오는 생 신입인 나를 본인 옆자리에 앉혔고 발표를 하러 앞에 나가기 전 나에게 편하게 넘겨보라고 발표 자료 화면을 띄워둔 본인 노트북을 건네주었다. 회의도 이 선배도 모든 것이 낯설었던 나는 정말 하나도 알아듣기 힘든 내용들을 귀로 튕겨내며 애꿎은 스페이스바만 가끔 눌러댔다. 담당 선배의 배려에도 나는 회의 내용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비즈니스 일본어가 낯설었던 것인지 전문용어에 대한 공부가 부족했던 것인지 지금도 알 수 없다. 아마 둘 다이지 않을까.
여전히 3월이던 때, 석사 1학년 선배들로부터 연수를 받고 있었다. 앞으로 내가 쓰게 될 기계들의 사용방법을 설명 듣고 실험 방법을 설명 듣고 있었다. 실험실에는 우리 말고 H선배가 있었다. H선배는 실험 기계를 돌려둔 후 그 앞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하고 있었다. 전과는 다르게 올블랙 트레이닝복의 편한 복장이었다. 세 사람 밖에 없는 조용한 실험실에서 그 선배의 실험 기계만이 작은 소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그 선배에게 자꾸 눈이 갔다. 무슨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미 익숙한 듯이 실험을 돌려놓고 편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굉장히 실력 있는 선배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번 회의 이후 조금 편해진 게 아닌가 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가가기 어려운 선배가 되어있었다.
3월 마지막 날, 올해부터 도쿄 근교에 위치한 회사로 출근을 하게 되는 오랜 친구와 벚꽃을 보러 나왔었다. 도쿄에서 가장 유명한 벚꽃명소였고 벚꽃보다 사람구경을 더 했던 것 같다. 생각 보다 더 더 많은 인파에 우리는 사진 찍는 것을 포기하고 낮술부터 시작했다. 축제 기분을 느끼며 2차까지 기분 좋게 마시고 마지막 3차로 바에 가서 칵테일 한잔을 하기로 했다. 친구와 얘기하며 마지막 한잔을 하고 있을 때 H선배에게서 문자가 왔다. 내용은 즉슨 연구실에 자기 짐들이 남아있는데 이미 학생증을 반납하여 방학인 지금 연구동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학교에서 지정한 영업시간이 아닐 때 건물에 들어가려면 현관 리더기에 학생증을 터치해야 한다). 학교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 중에 학생증을 갖고 있는 사람이 나뿐이라 혹시 문을 열어줄 수 있냐는 부탁이었다. 그때의 시간이 저녁 9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술을 마시고 있었고 집에서 한 시간은 떨어져 있는 위치라서 조금은 곤란한 부탁이었다.
선배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곤란하다고 했더니 다음날부터 출근이라 오늘은 정말 짐을 빼야 된다면서 늦은 시간이라도 괜찮다며 끝까지 매달린 끝에 결국 11시쯤 역 앞에서 만나는 걸로 합의를 봤다. 대선배의 부탁이니 거절하기 힘들었다. 조금은 급하게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향했다. 역 앞에 도착해서 선배에게 연락을 하자 선배는 옆 앞으로 차로 나를 픽업했다. 조수석에는 그의 여자친구가 타있었다(여자친구 또한 졸업하는 선배이다). H선배는 연이어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바로 내일 출근인데 매우 곤란했다고 말이다.
선배가 짐을 옮기는 것까지 도와주고 나니 11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선배는 고맙다는 표시로 차 안에서 초콜릿 상자를 꺼내서 나에게 건넸다. 집에서 하고 있는 일이라고 했다. 상자에는 H선배의 성씨가 쓰여있었다. 집에서 제과점을 하는 모양이었다. 초콜릿으로는 부족했는지 선배는 나를 근처 편의점으로 데리고 가서 담고 싶은 만큼 담으라고 했다. 야심한 시간에 미안하다면서 말이다. 이제 첫 출근하는 사회 초년생이 무슨 돈이 있겠나 싶었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으로 먹을 바나나와 숙취해소를 위한 이온음료를 하나 담았다. 선배는 정말 괜찮다며 사양 말라면서 더 담으라고 부추겼고 마지못해 민트 사탕 하나를 더 고르는 거로 마무리했다.
편의점을 나와서 H선배와 그의 여자친구는 마지막 인사로 나에게 앞으로 열심히 하라고 응원해 주었다. 둘 다 한국에서도 잘 아는 대기업에 다음날부터 출근하는 이들이었다. 아마 내가 현역으로 대학에 입학했다면 지금 저들과 같은 입장이었을 것이다. 아직은 서늘함이 남아있는 밤바람이 불어왔고 그들의 얼굴을 보니 앞으로 졸업까지의 3년이 엄청나게 길게 느껴졌다. 우리는 뒤돌아서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유독 멀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R군과 도쿄역에 갔을 때였다. 도쿄역 지하에는 많은 기념품 상점과 식품 매장이 있었다. 그중 어느 백화점을 가도 있는 제과점 브랜드가 눈에 띄었다. 친구로부터 예쁜 틴케이스에 담김 러스크를 선물 받기도 한 브랜드였다. R군은 이 브랜드 이름인 H*****가 그 H*****라고 했다.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그 브랜드 이름을 다시 읽어보니 H선배의 이름이었다. 그렇다. 그는 대형 제과 브랜드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동네 제과점집 아들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선배가 재벌이었다는 사실이 신기한 것도 잠시, 저번 편의점에서 선배의 주머니 사정을 걱정하며 물건을 담지 않았던 게 생각났다.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에게서 느껴졌던 범상치 않은 분위기의 출처가 이것이었나 보다. 신기한 인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