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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즈 Sep 11. 2023

대학원을 가는 이유

포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같은 과 한 학년 위에 친한 한국인 언니가 있다. 전부터 몇 번 등장한 Y언니이다. Y언니와는 입학하고 처음 만났다. 둘 다 내향적인 성격에 어색하게 한인타운에서 만나서 엽떡을 먹었었다. 1살 동생인 나에게도 언니는 쉽게 말을 놓지 못했다. 그런 Y언니가 좋았다. 정말 좋은 사람 같았다. Y언니와는 다른 한국인들과는 다른 동질감과 친밀감이 느껴졌다. 그 이유는 나와 이때까지의 과정이 닮았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에 입학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한국에 위치한 모 학원 출신인 것과 다르게 언니는 나와 같은 일본어학교 출신이다. 한국에서의 입시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급하게 일본으로 넘어와 1년간의 보통의 일본어 수업과 1년간의 진학반 수업을 듣고 같은 학교 같은 학과에 진학한 한국인 여학생이다. 몇 년이 지나고서야 심지어 우리가 같은 어학교 출신인 것까지 알게 되자 더욱더 친밀감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언니도 나도 나란히 유년을 하게 되면서 동질감은 더더욱 짙어졌다. 중요한 시험을 함께 앞둔 시기에는 언니에게 정말 많이 의지했었다.




 언니는 힘들기로 유명한 로봇 연구실에 들어갔다. 아직 학부연구생인 나는 석사과정인 언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조언을 얻었다. 나는 굳이 긴 복도를 지나야 나오는 언니네 연구실 앞 엘리베이터를 이용했다. 우연히 언니를 만나게 되면 잠깐 얘기를 할 수도 있으니깐 말이다. 내가 로봇 연구실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Y언니는 내가 딱 하고 싶었던 머슬슈트를 연구하고 있었다. 연구실에서 가장 열심히 하는 사람 중 한 명으로 본인 아이디어로 특허까지 받아냈다. 그런 언니가 너무나도 멋있어 보였고 한창 내 연구가 재미없을 때즈음 언니의 연구 얘기를 들으며 마냥 부러워했다. 부러워하는 나를 보며 언니는 로봇 연구실 교수님의 만행과 막말이 담긴 메일을 보여주며 그곳은 지옥이라고 했다.


 로봇 연구실이 힘들다는 것은 우리 과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서 우리 연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연구실의 실체를 모르고 들어왔다. 우리 교수님은 학부생들에게는 매우 친절한 교수님이었다. 항상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걱정하셨고 특히 유학생들이 잘 따라올 수 있을지 걱정하시며 개인상담도 흔쾌히 받아주신다. 그래서 한국인 신입생 후배를 나에게 소개해준 것이기도 하다. 연구실을 알아볼 때 연구실 홈페이지를 참고했는데, 여러 이벤트와 파티가 많았고 다 같이 여행을 가는 여름 합숙 또한 즐거워 보였다. 동아리도 한번 못해본 탓에 대학생활 내내 신입생 환영회며 합숙이나 MT라는 걸 가본 적이 없던 터라 그런 행사들이 좋아 보였다. 또 가장 중요한 국내외 학회에서 발표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준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어차피 하고 싶던 로봇을 못하게 될 바에야 스펙을 많이 만들 수 있는 곳을 고르고 싶었으니까. 우리 연구실은 우리 과에서 돈이 가장 많다고 소문난 연구실이고 돈이 많은 연구실이 좋은 연구실이라고 생각했다.


 연구실에 들어오고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더치페이'문화였다. 교수님과 함께 참석하는 모든 회식과 모임은 그때의 음식과 술값에 대하여 참가비를 내야 한다. 당연히 참석 여부에 대한 선택권은 없다. 뭐 그래도 다 같이 맛있는 걸 먹고 맥주를 마시는 게 즐거웠기 때문에 대부분의 이벤트는 즐거운 마음으로 참가했다. 교수님은 맥주를 좋아하는 나를 반가워하시며 친히 병뚜껑을 따주시기도 했다. 문제는 여름합숙 비용이었다. 여름합숙만큼은 연구비에서 지원되는 줄 알았는데 이 또한 자비였다. 이번 여름합숙은 교토대를 방문하고 나고야로 이동하여 도*타 자동차의 본사 연구소를 견학하는 1박 2일 코스였다. 그런데 도쿄에서 다 같이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교토에서 집합인 형태라 늦지 않기 위해선 하루전날 출발하여 하루를 묵고 교수님에게 합류하는 2박 3일 코스가 되었다. 교토까지의 왕복 신칸센(*일본의 KTX)이 굉장히 비싸기 때문에 교통비와 숙박비 그리고 교수님이 예약하신 고급 일식집 식사비용까지 합하면 대략 5만 엔(약 50만 원) 정도가 들었다. 학생에겐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예상치 못하게 연구실 생활로 드는 비용이 꽤 발생하자 당황스러웠다. 일본문화에선 당연한 건지 모르지만 한국인인 내 입장에선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돈과 관련된 스트레스는 이벤트 비용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연구실은 여러 기업과의 공동연구를 진행함으로써 연구비를 투자받고 담당 학생들에게 아르바이트비를 제공해 준다. 대부분의 일본 연구실이 급여가 나오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돈을 받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이 큰 메리트라고 생각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생활이 약간은 풍요로워졌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작은 돈에 딸려오는 책임은 생각보다 컸다. 교수님은 툭하면 학생들에게 그 정도 돈을 받을 만큼 일을 하고 있느냐고 타박했다. 여기까지는 받는 돈이 있으니 감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실험 기기의 수리비에 대한 구박은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 연구실은 17년째 이어온 연구실로 다양한 실험기기를 보유했지만 모두 오래되었다. 운이 나쁘게도 올해부터 한꺼번에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교수님은 실험기기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마지막으로 사용한 학생을 찾아내 혼냈고 수리비에 대한 내용을 단체메일로 학생들에게 뿌렸다. 이런 메일이 잦아지자 무서워서 제대로 만지지도 못하겠는 지경에 이르렀다. 비싼 장비인 만큼 다룰 때 주의해야 되는 건 맞다. 하지만 우리는 정당하게 몇천만 원의 학비를 내고 배우는 과정인 '학생'이다. 원칙상 연구실에 있는 그 어떤 실험기기라도 망가뜨렸을 때 그 책임은 모두 학교에 있다. 그런 우리에게 월세도 못 내는 급여를 준다는 핑계로 연구비에 대한 구박을 하는 것이다. 이는 엄연한 갑질이다.


 이런 교수님의 연구비 구박에 대한 스트레스와 연구 주제에 대한 흥미 저하, 그리고 교수님의 '포스터'발언 사건 이후로 나는 연구실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늘 하고 싶었던 로봇 연구실로 옮기고 싶어졌다. 취업은 로봇업계로 하지 않더라도 학생 때는 원하는 걸 하고 싶어졌다. 보아하니 미국 학회도 불합격이 될 것 같고 교수님께 잘 말씀드리면 굳이 막지도 않으실 것 같았다. 로봇 연구실에는 Y언니를 포함해서 친한 친구가 꽤 있으니 적응하는데 문제없을 것 같았다. 특히 가장 의지하는 Y언니가 머슬슈트를 하고 있으니 든든했다. 내년부터 머슬슈트를 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설레기 시작했다.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에 들어가서 부모님께도 연구실을 옮기고 싶다는 얘기를 하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쯤 충격적인 연락이 왔다. Y언니가 대학원을 그만두었다는 얘기였다. 바로 Y언니에게 연락했다. 진짜일리 없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근래 2개월 동안 너무 힘들었다고. 자기는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언니는 몇 달 전부터 자기가 그만두면 그 자리에 나보고 들어오라고 얘기했었다. 당연히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그만두었다는 걸 듣고 나니 언니가 정말 힘들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언니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은 것 같아서 미안해졌다. 언니는 나에게 끝까지 버티라고는 못하겠다고 했다. 언니는 앞으로도 힘내라는 말고 함께 연구동을 떠났다. 언니가 떠났다 생각하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입학 때부터 쭉 학교에 있던 언니었다. 이제 일본으로 돌아갔을 때 연구동에 Y언니가 없다고 생각하니 슬펐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루트로 같은 길을 바라보던 언니가 그만두었다는 사실이 나에게 크게 다가왔다. 과연 나는 잘 버틸 수 있을까.


 Y언니가 그만둔 것과 미국 학회에서 나의 발표를 승인한 것까지 결국 나는 지금의 연구실에 남는 걸로 결정했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그러나 요즘은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나는 왜 대학원을 가려고 했을까. 그냥 고등학생 때부터 공대에 가면 대학원을 당연히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인터넷에 떠도는 대학원에 대한 소문은 그저 '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나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과 적응하기 힘든 일본문화와 Y언니가 그만둔 사건까지 정신적으로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원에 가려는 내 마음이 무엇일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포기할 용기가 없는 것은 아닐까... 내 일본 유학이 예정보다 빨리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Y언니와 친구들과 함께 갔던 디즈니랜드. 올해도 다 같이 가기로 했는데 언니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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