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입다물게 만든 사건
얼마 남지 않은 학회 준비로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던 차, 교수님의 단체 메일이 도착했다. 내용은 익일 스웨덴 왕립 공과대학의 박사님이 연구실에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후쿠오카에서 열리는 국제학회 참석차 일본을 방문하게 됐고 우리 교수님과의 연으로 연구실을 방문해서 우리들을 상대로 강의를 해주시고 연구실을 둘러본다고 한다. 교수님의 단체 메일의 답장으로 조교인 K상의 메일이 도착했다. 스웨덴 박사님 방문일정에 있어서 역할분담을 제시한 내용이었다. 나를 포함 대부분의 학생들이 청강을 맡았고 내 동기 중의 한 명이 캠퍼스 근처 역으로 마중을 나가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중 담당 동기가 K상에게 우리 중에서 영어를 제일 잘하는 사람으로 나를 지목하였고 K상은 나도 함께 가서 박사님을 모셔오라고 하였다. 갑작스럽게 맡게 된 일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오랜만에 영어를 써볼 수 있는 것인가 하여 조금 기대가 되었다.
스웨덴 박사님의 방문일이 되었고 마중담당인 나와 동기는 역으로 향했다. 동기는 꽤 긴장을 한 듯 보였다. 만나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음... 살짝 긴장이 되기도 했지만 긴장보다는 설렘이라고 하고 싶다. 영어 회화를 할 기회가 얼마 없으니깐 말이다. 도착 예정시간보다 살짝 늦은 시간에 개찰구를 통과하는 금발의 서양인이 보였다. 우리가 찾는 박사님인 듯싶었다. 나는 바로 다가갔고 박사님인 것을 확인하고 인사를 건네고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그는 마중 나와줘서 고맙다며 캠퍼스로 향하는 길 내내 친근하게 말을 걸어 주었다. 그는 나에게 무슨 연구를 하고 있냐고 물었고 영어로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뒤따라 걸어오는 동기도 조금씩 용기를 되찾고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거의 도착했을 때쯤 그는 나에게 왜 기계공학을 선택했는지 물었다. 나는 로봇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는 지금 하고 있는 트라이볼로지로도 충분이 로봇 엔지니어가 될 수 있다며 상기된 목소리로 이것저것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 상황이 신선했다.
박사님을 모시고 연구실로 들어가자 K상과 교수님이 박사님을 회의실로 안내했다. 임무를 마친 나와 동기는 도망치듯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다. 박사님의 강의를 듣기 위해 아이패드와 안경을 챙겨서 회의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강의가 시작되었다. 내용은 박사님이 하고 있는 연구와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였다. 박사님은 영어를 못하기로 유명한 일본 학생들이 대상이어서 그런지 많이 어렵지 않은 단어와 속도로 강의를 하셨다. 문제는 서양 박사님 답게 중간중간 학생들과 소통하려 했다는 것이다. 일면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나에게 질문들이 던져졌고 조금조금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질문은 계속됐다. 그럴 때마다 일본인 학생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고 있었다.
강의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우리 연구실의 에이스이자 국제 학회를 가장 많이 다니고 있는 R군이 먼저 실험 장치에 대한 질문을 했다. 약간의 일본식 영어 억양이 있었지만 정돈된 문장으로 잘 얘기했다. 역시 R 군이었다. 이어서 나 또한 질문을 했다. 박사님은 베어링과 기어의 윤활제로써 오일이 아니라 그리스(*반고체 윤활제)를 써야 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를 물었다. 박사님은 원하는 질문이었는지 조금 빨라진 속도와 들뜬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꼭 그리스를 써야 된다기보단 오일을 씀으로써 야기되는 문제의 해결책으로 그리스를 쓰는 것이 좋다고 대답했다. 대답을 듣고 나는 바로 그리스의 높은 점성이 기계의 효율을 낮추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즉각적으로 한 말 치고 잘 만든 문장이었다. 박사님은 아주 좋은 질문이라며 신난 듯이 내 눈을 보며 대답해 주었다. 사실 그와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이 꽤 부담스러웠고 시선에 집중하느라 내용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박사님은 우리들이 일본의 미래라고 말하며 전기를 생산할 에너지원으로서 무엇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질문했다. 정적이 흘렀다. 어느 정도 말을 하고 나니 긴장은 다 풀렸고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나는 일본의 미래도 아닐뿐더러 일본 사정을 잘 알지 못해서 가만히 있었다. 교수님은 박사님이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어로 누구라도 빨리 대답하라며 재촉했다. 교수님의 목소리톤이 이대로 있다간 끝나고 다 같이 혼날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내가 손을 들었다. 나는 일본 상황은 잘 모르겠고 한국의 경우에 대해 설명하며 내 의견을 말했다. 내 대답이 끝나고 박사님의 짧은 답변으로 마무리됐다. 그럼에도 다른 학생들은 말이 없었다. 교수님은 일본어로 일본 대표는 누구 없냐고 재촉했다. R군이 마지못해 손을 들고 대답을 했다. R군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모든 강의가 끝이 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도 못 하던 석사생들 쪽을 쓱 둘러보았다. 다시없을 역전된 이 상황을 조금 즐기고 싶었다. 다들 얼이 빠진 듯했다.
R군과 살짝 눈인사를 하고 짐을 챙겨 회의실 문으로 향했다. 그때 교수님을 나를 붙잡고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 좋았다고. 나이스 했다고. 엑설런트 했다며 정말 좋아하셨다. 생각보다 격한 교수님의 반응의 기분이 좋은 동시에 쑥스러웠고 나는 소심하게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고개를 살짝 내리며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연구실로 들어갔다.
모두들 진이 빠져 보였다. 다들 50프로 밖에 알아듣지 못했다며 칭얼거렸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이제 내 기분을 알겠냐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외국어로 강의 듣는 기분을 말이다. 다들 이제 조금은 알겠다고 했다. 곧이어 교수님이 연구실로 들어왔다. 교수님은 나와 동기들을 모아놓고 일본의 미래가 걱정된다고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길러야 된다고 말이다. 연설을 마치고 교수님은 나에게 생전 맡기지 않던 박사님의 실험실 투어를 맡기셨다. 일본인 손님이 왔을 때는 절대 맡기지 않는 일이었다. 마침 수업이 있었고 교수님의 제안을 거절했다. 연구동에 퍼진 소문으로 맘고생한 걸 생각하니 잘난 일본인들끼리 알아서 하라는 조금 못된 마음이 들었다.
그날 밤, 우연히 만난 R군은 나를 엄청 칭찬해 주었다. 사실 R군은 이번기회에 내가 모두에게 본때를 보여주었으면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정말 잘해주었다며 자기도 나를 보고 좀 더 분발해야겠다고 말해주었다. R군은 이것으로 함께 미국을 가는 다른 석사생 2명은 멀리 제쳤다고 말했다. 이때까지 뒷말하던 이들이 입을 다물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까지 나를 생각해주고 있는 줄은 몰랐다. R군의 진심 어린 따뜻한 말에 나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다. R군에게 정말 고맙다고 말했고 앞으로 잘해보자고 말했다. 아무도 남지 않은 불 꺼진 실험실에서 우리 둘은 빛났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이들이 무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