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깨닫는 나의 길
일본 대학에는 '오픈캠퍼스'라는 행사가 있다. 매년 여름방학 때 학교를 열어서 고등학생과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학교 설명회와 모의 수업 등 다양한 이벤트를 개최한다. 여기서 공대라면 빼놓을 수 없는 이벤트가 연구실 소개 및 견학 이벤트이다. 대학 면접이나 자기소개서에 'OO연구실에 관심이 있어서 오픈캠퍼스에 참가하여 연구실 견학을 했습니다. OO연구실에 관심이 있어서 이 대학에 입학하고 싶습니다' 등으로 어필하기 좋아서 갈 수 있다면 가는 것이 매우 유리하다고 배웠고 나 또한 수험생시절 우리 학교 오픈캠퍼스를 왔었다. 나의 목적은 당연히 로봇 연구실이었고 실제로 머슬슈트를 착용해 본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이건 면접 때 좋은 이야깃거리가 됐었다. 그렇게 입학을 하고 4년이 흘러 이제는 내가 오픈캠퍼스를 준비해야 되는 입장이 되었다.
원래 오픈캠퍼스는 여름방학때 한다. 연구실 소개로 각 연구실마다 포스터를 걸어두고 방문객에게 간단히 설명을 해주고 실험실을 구경시켜 주는 코스로 진행된다. 보통 대학원생들이 담당하게 되는데 우리 연구실은 막내인 학부생들을 시킨다. 아직 한 학기만 다닌 우리가 맡아도 될지 의문이지만 시키면 해야 되는 게 막내의 숙명이다... 운이 좋게도(?) 나는 이번 여름방학이 시작하자마자 한국을 갔기 때문에 올해는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캠퍼스 측에서 올해는 학교 전체가 아닌 캠퍼스 독자적으로도 한 번 더 오픈캠퍼스를 한다고 했다. 조교인 K상은 9월에 있는 두 번째 오픈캠퍼스를 담당해 줄 사람을 구하는 메일을 몇 번이고 보냈지만 모두들 답장이 없는 듯했다. 나는 여름 때 참여를 못한 게 마음에 걸렸고 결국 하겠다고 K상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K상의 몇 번의 구애 끝에 다른 내 동기 한 명과 석사2학년 선배 하나가 나와 함께 이번 오픈캠퍼스를 담당하게 되었다.
당일날 12시에 연구실에 모였다. 이번 오픈캠퍼스는 방학시즌이 아니기에 수험생보다는 연구실에 관심 있는 기업사람들이나 학부 3학년들이 많이 오지 않을까 하고 예상하고 있었다. 진행도 각 연구실이 아닌 큰 강의실 하나에 한 학과가 모여서 포스터를 걸어두는 형식으로 달라져있었다. 포스터는 다행히 여름에 만들어둔 것을 그대로 써도 된다 하여 번거로운 준비과정 없이 포스터를 거는 것 만으로 모든 준비가 완료됐다. STAFF라고 쓰인 명찰을 목에 걸고 방문객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시작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방문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과는 다르게 고등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중학생도 있었다. 재밌는 것은 부모님과 함께 온다는 것이었다. 동기에게 물어보니 보통 부모님과 오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기계공학과여서 그런지 아버지와 함께 온 남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몸은 다 큰 것처럼 보여서 그런지 그 모습이 조금 귀엽게 보였다.
따로 설명 멘트를 준비하고 연습한 것이 아니라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다행히 여름 때 진행을 했었던 동기가 나서서 응대를 해주었다. 나는 옆에서 열심히 동기의 말을 외웠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온 아버지들이 꽤 날카로운 질문들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이쪽 업계에서 일하시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동기가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이었고 당황한 동기를 대신해 나서서 대답을 했다. 앞서 하는 기본 설명을 동기에게 다 맡기고 있어서 미안했던 찰나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있어서 기뻤다. 그래서 기본 설명은 동기가 하고 질의응답은 내가 보조해 주는 식으로 역할 분담이 되었다. 물론 한꺼번에 여러 팀이 온 경우는 나도 열심히 외운 멘트로 설명을 했다.
기억에 남는 팀은 남학생과 함께 온 어머님이었다. 어머님은 연구보다 학교생활에 관심이 많으셨다. 연구실 생활을 물으셨고 유년에 대해서 물으셨다. 마침 내가 유년을 한 입장이기에 높은 유년율이 사실이긴 하나 그 시기를 본인이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매우 귀중한 시간이 된다고 설명했다. 어떤 학생은 유학을 다녀오기도 한다고 말이다. 나 또한 그 시기에 새로운 언어를 배웠다고 했다(실제로 나는 중국어 HSK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이과대학이긴 하지만 영어 공부를 게을리해선 안된다고 조언해 드렸다. 대답을 들은 어머님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관점이니 흥미로워하셨고 옆에 있는 아들에게 역시 영어도 열심히 해야 된다고 잔소리했다. 뭔가 내가 실제로 유년을 했기에 말할 수 있었던 것들이어서 뿌듯했다.
여러 팀의 응대를 마치고 나서 동기는 나에게 이런 이벤트가 처음이지 않냐며 역시 소통 능력이 좋다고 말했다. 나는 처음이라고 대답했고 고맙다고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처음은 아닌 듯싶다. 중학생 때 구청에서 하는 '청소년 운영위원회'라는 것에 가입했었다. 구청에 소속된 중고등학생들로 이뤄진 단체였고 학생들끼리 구청 행사를 기획하고 여러 이벤트를 주최하는 동아리 같은 집단이었다. 이벤트의 대부분이 시민들과 소통하며 진행하는 방식이었고 어쩌면 낯선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무엇인가를 소개하는 것을 그때 배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나는 고등학생 때 방송부 아나운서였다. 조회나 학교축제 등 학교 행사 때마다 교내 방송을 담당했고 이런 자잘한 경험들이 오늘날 나의 자연스러움에 녹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번 외국 박사님 방문 때도 그렇고 내가 낯선 사람들에게 심지어 그들이 외국인이어도 당황하지 않고 대응할 수 있는 이유는 어린 시절 캐나다 어학연수와 일본에서 산 세월 덕분이다. 일본어를 한마디도 못하던 시절에도 일본에서 혼자 살아남았는데 무엇인들 무섭겠냔 말이다. 캐나다에 있을 때 뮤지컬 수업이 있었는데 마지막에 꽤 큰 무대에서 공연을 한 경험 또한 나에게 남아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들의 10대는 공부 이외의 것들은 다 쓸데없다고 하는 분위기였다. 모두들 중학생이 되면 이때까지 다니던 미술학원이나 피아노학원 태권도등을 다 그만두고 오로지 학업에만 집중하게 됐다. 고등학생이 되면 더더욱 심해지고 심지어 동아리마저 지망하는 학과랑 관련된 동아리를 만들어서라도 들어갔다. 그러나 우리 엄마는 조금 특이하게 공부 말고도 이것저것 알아오셨고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다 시켜주었다. 어쩌면 그 시간을 다 공부에 몰두했다면 한 번에 입시에 성공하여 일본에 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때까지 나를 공부로 몰아세우지 않은 엄마를 조금 원망하기도 했다. 조금 더 밀어주었다면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철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엄마에게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다양하게 시켜준 경험들이 모두 단 하나도 버릴 것 없이 내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인고의 시간 끝에 이것들은 하나로 모여서 나의 무기가 되었다.
나의 장점과 무기를 잘 살려서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조금씩 내 길을 찾아가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것들은 조금씩 쌓아온 경험의 결정체이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공부만이 다는 아니다. 이젠 이걸 확실히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