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는 사람들
연구실을 다니다 보면 연구동 사람들의 특징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일단 교수님들은 일반 사람을 이해를 못 한다. 이분들에게 '열심히'는 기본 중에 기본이다. 그냥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을 항상 '열심히'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연구에는 주말 따윈 없다면서 휴일이라 조용한 연구실이 외롭게 느껴진다는 메일을 토요일 아침부터 쏘는 교수님을 보고 이런 말에서 아무런 문제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회사도 이러진 않는데 말이다. 대부분의 교수님들이 이 같은 행동을 보이는 것이 회사생활을 안 해보셔서 그런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점점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교수님 뿐만 아니라 그 밑에 조교들도 마찬가지였다. 학부 수업 때 정장을 입고 들어와 시험 감독을 하고 질문을 받던 TA들을 연구동에서 보면 가장 추레하고 가장 피곤한 얼굴을 하고 좀비처럼 복도를 지나간다. 강의실에서 보았을 땐 그들의 본업이 수업 보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들의 본업은 연구이고 수업 보조는 대학에 남기 위한 귀찮은 노동임을 안다. 특히 사무 비서의 근무 태반으로 각종 행정 업무까지 떠맡게 된 우리의 K상은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이다.
K상은 지난여름에 2달 동안 미국으로 유학을 가있었다. 유학을 가는 대학이 IVY리그 대학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되게 신기했다. K상의 출국을 앞두고 선배들의 의견을 둘로 나뉘었다. 교수님보다 나서서 잔소리하는 K상이 없으니 편해질 거라는 파와 교수님의 히스테리를 받아주는 샌드백 역할과 안 들어도 될 소리를 필터링해 주는 필터 역할이 없으니 힘들 거라는 파로 나뉘었다. 나는 후자의 편에 섰었다. 가끔 교수님의 선 넘는 메일을 가지고 나에게 따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준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까지 대부분의 연구 상담을 K상에게 했어서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부모 잃은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K상이 없는 때 교수님과 직접 상담하고 중간발표를 준비했었는데 역시 교수님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시원시원하게 상담해 주셔서 K상의 빈자리는 바로 채워졌다. 하지만 문제는 교수님의 히스테리였다.
샌드백이 없어지고 필터가 사라지니 그 파편들은 고스란히 전파를 타고 학생들에게 꽂혔다. '이런 얘기까지 들으며 다녀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화 불가능한 말들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핸드폰을 확인할 때마다 두려움을 느껴야 되는 날이 반복될수록 K상의 빈자리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이때까지 이 스트레스를 혼자 다 받아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에 대한 반증으로 미국에 있는 K상의 얼굴은 활짝 피어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오랜만에 있던 화상 팀 회의 때 아직 미국이었던 K상은 미국에서 회의에 들어왔었다. 표정이며 말투며 편안하고 조금 신나보이기까지 했다. 역시 이곳을 벗어나 있으니 좋은 듯했다.
K상이 돌아오고 나랑 R군은 이런 얘기를 했었다. 과연 K상의 얼굴은 얼마 만에 돌아올 것인가. 나는 2주가 걸릴 것이라고 했고 R군은 동의했다. 예상대로 역시 2주 만에 원래의 K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교수님의 히스테리도 같이 줄어들었다. 몇 주 후, 돌아온 K상과 다시 화상 팀 회의를 하게 됐었다. 예전처럼 피곤에 잔뜩 찌든 얼굴로 회의가 시작됐고 첫 발표자였던 나는 지난 2주간의 연구 활동과 앞으로의 2주간의 연구 활동에 대하여 보고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혼이 났던 것 같다. 진행이 느리다는 지적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보다 더 빨리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친구도 못 만나고 연구실-집-연구실을 반복하며 삼시 세끼를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우며 연구하고 있었다. 학회를 목표로 하고 있으니 일반 학생들보다 열심히 해야 되는 것은 맞지만 K상에게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첫 번째라 모두에게 할 말을 나에게 한 듯했다. 그리고 K상은 모두에게 전하는 말로써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다면 정말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다시 돌아온 영론발표도 코앞으로 다가왔고 미국 학회도 섬 큼 섬 큼 다가왔다. 그러나 몸이 많이 지쳐버렸다. 가장 힘을 내야 하는 이 시기에 의욕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할 일이 쌓이니 꾸역꾸역 어떻게든 해내고 있었다. 영론발표는 지난번과 비슷하게 좋은 반응으로 끝이 났다. 이제는 정말 미국 학회 준비에 전력질주를 해야 된다. 발표가 끝이 나고 지친 몸을 달래고 달래서 실험실로 끌고 갔다. 집중하고 나니 시간은 저녁 6시를 지나고 있었다.
저녁 6시가 지나자 실험실에는 나와 K상 뿐이었다. 저번에 얘기하던 독일 유학에 대해서 좀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말을 걸어봐야 하나 살짝 기회를 옅보았다. 고맙게도 K상이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얘기는 가볍게 취업에 대한 얘기로 시작됐다. 내가 자동차 메이커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일본 한국 미국 기업들을 얘기하며 여러 조언을 해주었다. 어느 나라에서 일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얘기가 나오니 결혼과 가정을 꾸리는 얘기가 나오게 됐고 연애 얘기가 나오고 정치 역사 사회문제 이것저것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날 줄을 모르고 신나게 이어졌다. 이야기는 실험실에 누군가가 들어오고 나서야 끝이 났다. 뒤돌아 앉아서 시계를 보니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세상에... 서서 이야기를 하면서 허리가 조금 아파오는 것은 느꼈지만 이렇게 길게 했을 줄은 몰랐다. 조교랑 둘이 남은 실험실에서 선채로 3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했다니... 정말 외로웠나 보다. 그리 외로움을 타는 성격은 아니라 유학 생활을 잘 견딜 수 있었다. 코로나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말이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 다른 느낌이다.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리고 K상도 같은 마음일 것 같다. 꽤 속 깊은 이야기를 하고 나니 K상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앞으로 또 듣게 될 서운한 얘기들에 대해서 조금 용서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유효기간이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꿈을 꾸는 사람들은 다들 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