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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즈 Oct 20. 2023

연구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사과가 뉴턴의 눈앞에서 떨어지기까지

 미국 학회가 정말이지 코앞으로 다가왔다. 학회 측으로부터 미리 발표자료를 제출하라는 공지를 받았다. 아직 더 확인하고자 하는 데이터가 있었기에 조교인 K상으로부터 일단 정리된 만큼만 ppt로 만들어서 제출하는 걸로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몇 주 후, 완성된 ppt자료로 조교인 K상과 R군 다른 선배 1명 이렇게 4명이서 회의를 하게 됐다. 다행히도 K상은 매우 만족한 듯 보였다. 선배들도 내 자료가 정말 알기 쉽다고 감탄하였다. 몇 가지 수정사항을 보고 받고 회의가 끝이 났다. 이제야 좀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자료를 만들기까지 쉼 없이 해오던 실험과 데이터 수집 그리고 모아 온 데이터를 분석하기까지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 이유가 단순히 할 일이 많고 바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장 나를 괴롭힌 것은 내 연구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우리 연구실은 '트라이볼로지'라는 학문을 연구하고 있고, 나는 전기자동차에 쓰이는 기어의 손상을 방지하고자 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좀 더 자세히는 기어 표면에 생기는 마모와 피로손상을 방지하는 윤활첨가제의 특성을 연구하고 있다. 문제는 이 마모와 같은 표면 손상은 일관되게 일어나지 않다는 것이다. 최대한 변수를 통제하여 같은 조건에서 실험을 해도 결과는 똑같이 나오지 않는다. 어느 정도 경향성이 보일 때까지 여러 번의 실험을 반복하여 평균을 내고 이 결과가 맞을 거야! 하고 믿는 수밖에 없다. 이 '믿음'에 영역에서 나는 강하지 못했다. 여러 번의 실험모두 비슷한 경향성을 보여주었고 K상과 교수님에게 보고했을 때 아무것도 문제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내 결과에 대해 실험자인 내 머릿속에선 끝까지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지 못했다. 이미 학회날짜는 다가왔고 이때까지의 결과를 세상에 공개해야 한다. 물러날 곳은 없다.


 K상과의 회의가 끝나고 나는 바로 자료 수정에 들어갔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은 아니었다. 그때, 나와 비슷한 연구를 하고 있는 동기가 못 보던 프로그램을 쓰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얼마 전에 논문에서도 본 표면의 형상을 분석하는 최신 프로그램이었다. 이때까지 쓰고 있던 분석 프로그램에 많은 불만을 갖고 있던 나는 그 프로그램이 무척 반가웠다. 동기의 말로는 기존 것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 프로그램을 써서 다시 분석하면 실험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고 모든 고찰을 다시 생각해야 될 수 도 있다. 그러나 기존에 쓰던 프로그램보다 더 정확하고 믿을만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면, 이상하다고 느낀 부분이 납득 가능한 수준으로 올라올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내가 내 연구 결과를 더더욱 신뢰할 수 있게 된다면 이 지옥 같은 불신 속에서 빛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K상에게 보고했고 결과가 바뀌어도 좋으니 새 프로그램을 쓰라는 답변을 받았다. 잔뜩 흥분된 상태로 분석을 시작했다.


 하지만 결과는 기존과 똑같았다. 새 프로그램도 기존 프로그램이 제대로 잡지 못한 노이즈를 잡아내지 못했다. 좌절했다. 시간은 저녁 8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이때까지 내리지 못한 결단을 내렸다. 프로그램을 써서 수치화한 결과가 아닌 직접 현미경으로 관찰한 감각적인 결과를 제시하는 것으로 말이다. 이것이 내가 진짜로 믿는 결과니깐 말이다. 이것이 옳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드디어 빛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밤 9시가 되어 술자리에 갔던 K상이 돌아왔다. 눈으로 보기에는 다리까지 빨개진 만취상태였다. 목소리도 매우 들뜬 듯 보였지만 과학적인 부분은 멀쩡하다며 상담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면서 내 자리 옆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큰맘 먹고 한 결심을 보고하는 자리에 K상이 만취상태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일단 내 생각을 최대한 정리해서 전달했다.


 내가 한창 내 생각을 설명하며 컴퓨터 폴더를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자료를 보여드리자 K상은 나에게 열정이 넘쳐 보인다면서 연구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대답하기 망설여지는 질문이었다. 연구를 좋아해서 열심히 하는 것인지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연구를 좋아하는 것이 되는 것인지 나 조차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마침 K상도 술이 들어간 상태이니 이때까지 내가 갖고 있던 트라이볼로지에 대한 의문과 불안감에 대한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K상의 표정은 어느덧 진지하게 바뀌었고 옆에 있던 작은 보드마카판을 들고 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연구에는 3가지 단계가 있다고 한다. 가장 밑바닥 단계인 '원시적 연구' 그리고 그 윗단계인 '발전하고 있는 연구' 그리고 최종 단계인 '발전된 연구' 이렇게가 있다고 한다. 여기서 트라이볼로지는 가장 밑바닥 단계인 '원시적 연구'에 해당한다고 한다. 즉, 연구방식이 피라미드를 짓던 고대 이집트시절과 달라진 게 없다고 한다. 따라서,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 맞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수업시간에 교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것 같다. 마찰과 마모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이다. 여기에 K상은 뉴턴 앞에 사과가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과는 수없이 떨어졌고 그것을 본 사람들이 의문을 품고 여러 생각을 내놓고 토론한 과정들이 쌓이고 쌓여 뉴턴 앞에 사과가 톡 하고 떨어졌을 때 비로소 만유인력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뉴턴이 말한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서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라)'가 떠오르는 얘기였다. 그리고 K상은 본인과 그리고 우리들의 연구들이 쌓이고 쌓여 언젠가는 '발전하고 있는 연구'에 도달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템이 되고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트라이볼로지에 남아주었으면 한다고 말이다.  


 K상의 말은 나에게 이렇게 전달되었다. 내 연구 결과가 불안정할지라도, 설령 틀렸음이 밝혀지더라도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 부서지고 깨질지라도 멈추지 않고 실험을 하고 분석을 하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이 과정 자체가 의미가 있다는 것. 마음이 편안해졌다. 보잘것없어 보이던 내 연구에 의미가 생겼다. 내 결과들이 진실이 아니면 어떡하지에서 오는 불안감이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던 중 빛이 드리웠다. 그것들이 쌓여서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었다. 그것들이 커다란 과학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 하면 나에게 큰 영광이다.


 이제는 마음 편하게 연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려움 없이 열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로소 연구란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다. 다시 연구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전과는 다른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캠퍼스에서 사 먹은 프렌치토스트. 가격에 비해 터무니없는 양이었지만 종이컵이 귀여웠으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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