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밍에 타이밍이 겹치면 기회가 된다
지난번 스웨덴 박사님의 방문 때 영어로 잘 대처한 이후로, 연구실에서 나의 입지가 사뭇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내가 미국 학회에 가는 것에 대하여 견제 섞인 부정적인 시선이 많았고 교수님 또한 아직 밝혀지지 않은 나의 영어실력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이후로 동기들은 미국학회 준비로 인해 바쁜 나를 여러 방면으로 배려해 주기 시작했고 나는 이들에게 인정받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마음이 여유로워졌고 연구실에 배정된 초창기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맨탈이 안정되고 동기들과의 우애가 돈독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달라진 교수님의 평가였다. 얼마 전 후쿠오카에서 열린 국제학회 참석을 위해 R군을 포함한 몇 명의 석사들이 교수님과 함께 후쿠오카로 떠났고 그곳에서 R군은 나에 대한 교수님의 평가를 교수님에게서 직접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교수님은 그날 이후로 나의 미국 학회 발표에 대해서 안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스웨덴 박사님이 방문하신 이후로 일주일간 2번의 해외 교수님 방문이 있었다. 스웨덴 박사님 때 좋은 평가를 얻은 그 모습을 유지해야 된다는 엄청난 부담감이 몰려왔다. 한번 좋은 인상을 심어 두고 나면 편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계속해서 잘 해내야 된다는 사실이 이렇게 부담이 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이번 강의는 다른 연구실 학생들도 참석하는 대학원 수업에서 특별강연 형태로 진행될 예정이어서 나서기가 많이 망설여졌다. 굳이 다른 연구실 사람들에게까지 튀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깐 말이다. 그러나 그런 걱정을 하기에는 교수님에게 잘 보이는 것이 더 중요했다. 모두들 당연한 듯이 기대를 하고 있을 거란 생각에 비장한 각오로 강의실에 들어갔다.
처음 들은 독일식 영어는 충격적이었다. 아무래도 유럽이라 그런지 기본적으로 영국식 발음이 섞여있었고 문제는 말의 높낮이가 거의 변하지 않고 쭉 높게 유지되다 끊기고 유지되다 끊기고 하는 식으로 정말 알아듣기 힘들었다. 게다가 강의 자료는 학생을 타깃으로 했다기보단 기업 투자자를 타깃으로 한 수준이었다. 정말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듣기 힘든 수준의 강의가 이어졌고 동기들은 하나 둘 포기하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떻게 얻은 신뢰인데 교수님을 실망시킬 순 없었고 필사적으로 필기했고 질문시간 때 나서서 질문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수업이 끝이 났다. 이 수업 이후에는 K상마저 나에게 다가와 질문 내용을 물었고 박사생들도 나에게 다가와 몇 개 국어를 하는 것이냐며 대단하다 칭찬했다. 또 한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긴 심호흡을 뱉었다.
마지막 세 번째 해외 교수님 또한 독일인이었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연구실사람들끼리 회의실에서 듣는 강의였다. 지도 교수를 포함한 세명의 연구진이 방문했고 교수님과 조교 한 명이 강의를 했다. 발표자가 두 명이니 3시간을 넘기는 긴 강의였다. 다행히 두 번째 방문한 독일인 교수님보다 훨씬 알아듣기 쉬운 영어 억양이었고 내용 또한 학회 발표 수준으로 다운되어 있어서 편안하게 들을 수 있었다. 강의도중 내가 한 질문도 독일 교수님이 꽤 맘에 들어 한 듯 보였다.
독일 교수님은 마무리로 국제 학생 인턴을 환영한다면서 컨텍하라는 공고를 했다. 세 시간의 강의 끝에 몸이 지쳐가는 찰나 동공이 확장되는 얘기였다. 짧게 3개월에서 6개월 정도의 인턴쉽 프로그램이었고 연구실에서는 모두 영어로 일을 하게 돼서 독일어를 못해도 된다고 했다. 당연히 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독일 교수님의 연구가 나의 연구 테마와는 살짝 거리가 있었고 그 분야를 하고 있는 선배가 있어서 아무래도 그 선배가 우선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가 끝이 났고 독일 유학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상태였다. 나는 실험 샘플들을 챙겨 실험 센터로 향했다. 살짝 붕 뜬 마음으로 실험 기계에 샘플을 넣고 모니터를 보며 조작을 시작했다. 그때, K상이 독일 연구진을 모시고 센터로 들어왔다. 센터 투어를 하는 듯 보였다. K상은 마침 내가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에게로 모셔왔다. 독일 교수님은 나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물었고 나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설명을 마치고 K상은 독일 교수님에게 나를 굉장히 힘 있고 열정 있는 학생이라고 소개했다. 독일 교수님은 나의 질문이 매우 인상 깊었다고 했다. 약간의 용기를 얻은 나는 인턴쉽 프로그램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독일 교수님은 내 말을 반기면서 명함을 주셨고 영어 실력이 좋으니 와서 일을 하는데 문제가 없을 거라면서 컨텍하라고 했다. 연구 테마가 살짝 달라서 걱정이 된다 하니 교수님도, 옆에 있던 K상도 그건 전혀 상관없다고 말해주었다. 정말 갈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 교수님은 나에게 먼저 인턴쉽 얘기를 꺼내셨다. 내가 인턴쉽 프로그램에 굉장히 관심 있어한다는 소문을 들었다면서 말이다. 교수님은 그 연구실이 굉장히 좋은 곳이라고 했다. 먼저 얘기를 꺼내주신 것에 희망이 부풀었고 정말 갈 수 있는 것이냐고 여쭸다. 교수님은 일단 연구 테마가 같은 한 선배가 우선이라는 언질을 하셨다. 어쩌면 당연한 순서에 바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인턴쉽 기간이 딱 석사들의 취업활동 기간이었고 그 선배 또한 인턴쉽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했다. 시기상 갈 수 있는 기수는 나와 내 동기들이었다.
그리고 또 다음날, K상 또한 나에게 먼저 독일 인턴쉽 얘기를 꺼냈다. 이렇게 교수님과 조교가 연달아서 먼저 얘기를 꺼낸다는 게 굉장히 좋은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K상은 나에게 정말로 갈 수 있다고 말해주면서 올해 11월 말에 딱 미국 학회 끝나고 교수님에게 말씀드리면 보내주실 거라고 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R군도 가고 싶었는지 K상에게 물었으나 돌아온 답변은 시기가 맞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K상의 말을 듣고 나니 정말로 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K상 또한 석사 때 독일로 유학을 다녀왔다면서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이미 경험하고 온 선배도 있으니 든든했다. 독일 유학이라니... 생각만 해도 꿈만 같다.
늦은 밤, R군과 단둘이 실험실에 남아서 얘기를 했다. R군은 정말 부럽다며 실은 본인도 가고 싶어서 작년에 교수님께 얘기를 꺼냈다고 한다. 그러나 작년에는 모집하는 곳이 없다며 박사생이라면 자리가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한다. 정말 타이밍인 것이다. 온 우주가 나를 밀어주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마침 내가 실험을 하고 있을 때 센터로 투어를 왔으니 인턴쉽 얘기를 꺼낼 수 있었고 마침 내가 4학년이라 내년 석사 1학기때 유학을 갈 수 있는 것이었다. 좀 멀리 생각하자면 유년을 하지 않았으면 없었을 기회였다. 타이밍과 타이밍이 겹쳐서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기회를 붙잡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꿈같이 찾아온 기회에 나는 또 다른 새로운 꿈을 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