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가로막고 있던 건 나의 편견이었다
내 연구실 동기는 나를 포함 총 7명이다. 여기서 나랑 같은 전기자동차팀인 동기가 두 명이 있다. 보통 비슷한 연구테마를 갖고 있는 같은 팀끼리 그룹 회의에 참석하고 같은 기업과의 공동연구를 진행하기 때문에 동기들 중에서 이 두 명과 일적인 교류가 가장 많다. 문제는 이 두 명이 유년을 하지 않은 학생이라 학번으로 따지면 내 1년 후배이기 때문에 수업에서도 본 적이 없는 생판 남이라는 사실이었다. 더욱이 이 둘은 입학 때부터 절친이어서 둘 사이가 끈끈하니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다. 이 둘은 일본에서 흔히 말하는 'チャラ い(*챠라이)'한 느낌의 학생들이다. 한국어로는 '인싸'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비교적 화려한 무늬의 옷들과 왁스를 바른 헤어스타일, 귀에 걸려있는 피어싱 등 내가 평소 어울리는 친구들과는 사뭇 다른 타입의 사람들이다. 다른 팀 동기들은 자기 팀끼리 친해지는 와중에 가장 교류가 많은 같은 동기들이 내가 어려워하는 타입의 사람인 데다가 둘이 절친이기까지 하니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는 외톨이가 되어갔다.
두 동기의 초반 태도는 썩 좋지 못했다. 조교와 선배들의 찾음에 반응하지 않았고 걸핏하면 연구실에 친구들을 데려와 놀기 바빴다. 미국 학회에 나가겠다는 목표로 초반부터 열심히 하고 있던 나는 외부사람이 연구실 중앙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것이 매우 거슬렸다. 낯가림도 있는 성격이라 내가 왜 내 연구실에서 외부사람 눈치까지 봐야 되나 억울함마저 들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쯤 연구실을 옮길 생각으로 외부진학까지 생각했으니 나에게는 꽤나 심각한 문제였다. 그래도 R군과의 대화가 생각에 변화를 주어 약간의 선을 긋는 방식으로 마음의 평화와 나만의 중심을 잡아갔었다. 그들과 잘 지내기 위해서 선을 긋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잘 맞아떨어졌었다.
하지만 생각의 전환으로도 해결되지 않게 된 계기가 생겼다. 바로 교수님의 편애였다. 교수님은 초반부터 밀어줄 학생을 대놓고 티를 냈었다. 일본인 남학생을 선호하는 것이 전혀 특이할 건 없지만 너무 대놓고 티를 내시니 질투심이 생겼던 것 같다. 이 질투심이 분노로 폭발하게 된 것은 미국학회 언급을 하셨을 때였다. 분명 미국학회 발표를 고려할 것이라는 연구테마를 고르고 이미 실험을 진행시키고 있는 나를 뒤로하고 아직 아무런 작업을 하고 있지 않은 두 동기를 먼저 생각하고 있으시다는 게 납득할 수 없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낯선 억울함과 분노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분노의 화살은 애먼 두 동기들에게 향했다. 내가 절실하게 갖고자 하는 것을 쉽게 뺏어가는 얄미운 사람들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동기는 내게 동료가 아닌 경쟁자였다. 그 둘이 실험을 진행하고 있으면 불안했다. 나보다 더 빠르게 더 좋은 성과를 낼까 봐 두려웠다. 보고를 하더라도 발표를 하더라도 나보다 더 단단한 목소리와 정확한 발음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미치도록 부러웠고 그러지 못하는 나 자신을 한없이 자책했다. 동등한 위치에서의 경쟁이 아닌 내가 한참 뒤떨어지는 상태에서 시작된 경주라는 생각에 매몰되었다. 절대 좁힐 수 없는 일본어 실력의 격차와 교수님의 티 나는 남학생 선호는 나의 시선을 강제로 밑에서 그들을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최선을 다해서 겨우 동등해질 수 있는 그런 느낌으로 말이다.
물론 이 경쟁심과 승부욕은 나에게 엄청난 동력이 되어주었다. 확실한 목표와 적이 있다 보니 무엇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게 되었다. 그렇게 영론발표와 연구결과보고를 차곡차곡 거쳐서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미국 학회 멤버로 선발되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 학회 멤버로 선발되고 예상치 못하게 일렁이던 연구실의 묘한 분위기에 메스꺼움을 느꼈었다. 하지만 간절히 원했던 일인 만큼 눈과 귀를 닫는 방식으로 애써 중심을 잡았다. 내가 잘해서 뽑힌 거라고. 내가 노력해서 얻은 정당한 결과라고 말이다. 그때는 감당할 수 없었던 나를 향한 경계의 눈빛이 이제는 비로소 그들과 나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한숨 돌리고 나니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일까? 동기들을 대하는 게 한결 편해졌다. 더 이상 그들의 연구 진행 상황이 신경 쓰이지 않았고 오로지 나의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만큼 늘어가던 대화 속에서 나도 어느덧 그들에게 스며들어있었다. 내가 경쟁심과 질투심에 눈이 멀어서 우리의 관계를 비뚤게 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둘에게 내가 경쟁심에 불타오르고 있다는 티는 전혀 내지 않았다. 학회 따위 관심 없는 척 전혀 부럽지 않은 척 연기했다. 아등바등하는 모습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어느새 쉬는 시간에 둘러앉아 같이 웃고 떠들고 있는 그림 속에 내가 들어있는 것이 그들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하였다. 나는 속으로 많이 미워했는데 나를 친구로 대해주고 있었구나 하고 말이다. 미국 학회를 가지 못하게 됐다면 느끼지도 않았을 미안함이라는 사실에 부끄러워졌다.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만큼 더욱 부끄러웠다. 그들은 나보다 좋은 사람이었다.
얼마 전 K상에게 작게 혼난 적이 있다. K상이 내 실험 하나를 대신해 주기로 했는데 K상과 함께 가는 동기에게 나의 샘플을 맡겨보냈었다. K상과 이미 합의가 된 일인지라 나도 동기도 문제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러나 실험 다음날 K상은 나를 불러다 혼냈다. 워낙 사투리가 심해 알아듣기 힘든 K상이라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대충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조심하겠습니다라고 말을 한 후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고 몇 분 뒤 K상과 농담도 주고받고 전혀 마음에 남지 않은 해프닝이었다. 그런데 몇 시간 뒤 내 샘플을 갖고 갔던 동기가 조용히 내 자리로 와서 살짝 말을 걸었다.
"혹시 K상이랑 얘기했어...?"
"응 얘기했어. 조금 혼났다"
혼났다는 말을 들은 동기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을 했다.
"역시 혼난 거야? 내가 적당히 둘러댔어야 했는데 미안해"
순간 마음이 울렁했다. 동기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준 것이었다. 나는 너도 한 소리 들은 것이냐고 물었고 자기는 혼나지 않았다는 동기의 대답에 안심하고 그럼 됐다고 신경 써주어서 고맙다고 대답했다. 내 편이 되어 같이 상사의 뒷얘기를 하는 이 순간이 의미 있게 남았다. 같은 편이 된 느낌이었다. 동료가 된 기분이었다. 내 마음속에 동료애가 싹튼 순간이었다. 비로소 연구실에 마음까지 온전히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부족한 나를 품어준 동기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앞으로 남은 2년 반의 연구실 생활을 끝까지 함께할 내 소중한 동기들이다. 이제부터가 진짜 연구실 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