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익숙하지 않은 선배라는 위치
대학시절 나는 늘 혼자였다. 따돌림을 당했다기 보단 친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학을 들어올 때 나는 이미 삼수를 마친 22살이었다. 더 이상 친구관계에 매달릴 나이가 아니었다. 일본에 온 지도 3년 차였고 학교 사람이 아니더라도 나가서 만날 친구는 충분히 있었다. 희한하게 우리 기수 때 우리 학과에 한국인 유학생이 많았다. 중국인 유학생의 비하면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타 과는 한두 명인 것에 비해 한국인이 6명이나 됐으니 놀랄만한 숫자였다. 안타깝게도 그중에 여자는 나 혼자였다. 그리고 한국인 유학생들과 필요 이상으로 어울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은 한국에서 일본 공대를 준비하는 전문 학원 출신으로 이미 서로 아는 사람들이었다. 여느 한국 대학생들과 다르지 않게 대부분의 모임은 술자리였고 어딘가 나와 잘 맞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학교는 강의 듣고 공부하는 곳이고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교수님의 갑작스러운 메일이 도착했다. 제목은 '유학생의 공부상담상대 부탁'이었다. 한창 실험 중이라 데스크에 올려놓은 핸드폰 화면 속 메일의 제목만 한 번 쓱 훑어보곤 하던 것을 계속했다. 유학생의 공부상담이라... 아직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지만 제목만 봐도 자신이 없었다. 실험을 마치고 메일을 열어 내용을 제대로 읽어보았다. 내용은 즉슨 현재 1학년에 한국인 여자 유학생이 있고 공부나 학교생활에 고민이 있어 우리 교수님께 상담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수님은 나를 떠올리셨고 나에게 그 친구에게 공부에 대한 조언이나 상담을 부탁하셨다. 우리 과 1학년 한국인 여자 유학생이라... 누군지 안다. 한국인 학생회 친구들을 통해서 들은 적이 있다(나는 한국인 유학생회에 들어가 있지 않다. 굳이 어울려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었고 취업에 도움이 될 거라는 말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전혀 후회하고 있지 않다). 이 친구는 입학과 동시에 한국인 유학생회에 들어가 자신의 조언자가 될 만한 선배들을 찾아다녔다. 유학생회에 들어가 있는 내 동기들은 나를 연결시켜 주려 했고 나는 몇 번이고 거절했었다. 그리고 몇 달 후 생각지도 못하게 교수님을 통해서 연락이 온 것이다.
이때까지 연결을 거절했던 이유를 설명하자면 그냥 싫었다. 나는 친구를 많이 만들고 싶어 하는 타입의 사람이 아니다. 지금 있는 친구들로 충분했다. 새로운 인간관계는 그만큼의 에너지 소비를 요구했고 이미 연구실 인간관계로 버거웠다. 그리고 유학생회를 통해 사람을 소개받음으로써 이때까지 잘 유지해 왔던 유학생회와의 적당한 거리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유학생회 임원을 맡고 있는 내 동기들은 이런 나의 태도를 좋게 보지만은 않는다. 그러나 이미 내 밑으로 두 명 정도의 한국인 여학생이 있지만 그들 또한 나와 비슷한 생각인지 유학생회와 엮이지 않고 나와의 교류도 없이 잘 지내고 있다. 한 학번 선배인 Y언니 또한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고 우리 둘은 우연찮게 잘 맞아서 친해진 케이스였다. 적당히 있는 듯 없는 듯 편한 사람만 가끔 보고 조용하게 생활하다 졸업하고 싶었다.
여기서 조금 더 솔직하게 거절했던 이유를 생각하자면 자신이 없었다. 나의 성적이 말이다. 나의 학점은 백분위 딱 중간 정도이다. 그리 낮은 점수는 아니지만 유년도 했고 이래저래 힘들게 졸업반에 진학했기에 어딘가에 자랑할 점수는 아니다. 그리고 내 밑에 있는 한국인 여학생들이 굉장히 좋은 성적을 받고 있다고 들었다. 입학할 때부터 코로나 세대라고 불리는 기수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보다 훨씬 잘하는 친구들인 것은 변함이 없다. 신입생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그들이 해주는 게 낫지 나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나의 자격지심을 신입생에게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이런 연결이 불편하다고만 했다. 같은 한국인이라고 무조건 친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유학생회도 들어가 있지 않고 그냥 이대로 조용하게 있고 싶다고 말이다.
그렇게 잘 피했는데 이런 식으로 연결이 될 줄이야... 우리 교수님은 1학년 일반물리 수업을 담당하신다. 아마 상담할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오라고 하셨을 것이고 그 친구는 그 말에 상담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우연찮게 내가 우리 교수님 연구실에 있었던 것일 거다. 이것도 참 인연은 인연인 것 같다. 교수님의 부탁이니 이전 친구들의 부탁처럼 이유 없이 거절할 수는 없었다. 메일을 읽고 고민을 하던 차 교수님의 제안이 눈에 들어왔다.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씩. 한 달에 만 엔(약 10만 원)"
한다고 했다. 시급이 2만 5천 원인셈이다. 잘 생각해 보자. 자존심을 내세우기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나에게 주는 돈은 연구실 연구비용일 것이다. 그런데 이 돈을 아직 배정되기도 한참 전인 신입생에게 투자하신다니. 우리 교수님이 학생 교육에 진심인 듯 싶다. 일단 하겠다고 저지른 후 실험을 계속했다. 그리고 교수님이 실험실로 들어오셨다. 나에게 잘 부탁한다고 하셨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자 역시나 일반 물리 시간에 상담이 들어왔고 마침 우리 연구실에 우수한 한국인 여학생이 있다고 하셨다 한다. 내가 요즘 연구실 생활을 열심히 한 것은 맞지만 공부를 잘 한 케이스는 아닌데... 교수님도 이미 내 성적을 잘 알고 계시고 일을 맡기신 걸 테지만 역시나 자신이 없다.
자본주의에 굴복하여 이미 한다고 해버린 김에 새로운 도전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쩌면 후배를 도와주면서 무엇인가 선배로서의 자신감이 생길 수 도 있지 않을까? 다시 한번 1학년 기초 과목들을 돌아보는 기회가 될 수 도 있다(너무 오래전이라 다 까먹었다...). 뭐가 되었든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열심히 해보고자 한다. 올해는 두려워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극복하는 해가 되기로 했으니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