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동 수단으로 택시를 택했다. 병원 왕복 2번, 미용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번.
나는 언제부터인가 택시를 타면 기사님들의 이름을 살피곤 한다. 나보다 연배가 많은 분들이 대다수다 보니 우리 세대, 다음 세대의 이름 짓는 방식과 사뭇 다르다.
아주 예전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에는 오래사는 이름이 장땡이었던 것 같다. 이름을 막지으면 오래살았기 때문에 이름에 똥이나 막자를 넣어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 세대인 나의 부모님 세대는 숙이나 영, 준 같은 글자들의 돌림자들이 한눈에 봐도 꽤 많이 보인다.
조금 세련되었다 싶은 이름에는 민같은 글자도 두드러진다.
내가 이렇게 이름을 수집하는 대에는 내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이름을 짓느라 골머리를 앓기 때문이다.
왜 그런고 하니 나는 그다지 애정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지 않게 되었다. 세상에 정나미가 떨어진 후라 그 급감기를 지나자 감정은 소강상태가 되었지만 온기나 애정이라 곤 눈을 씻고 뜰래야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 보니 이름들은 꽤나 상투적이거나 너무 현실과 동떨어질때가 많다.
그래서 택시기사님들의 이름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 아마도 그들의 부모가 애정을 가지고 지었을 이름들.
이름이라는 것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무덤에 가기까지 내가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옷한벌만 건지는게 아니라 이름 하나 가져가는 것이다. 우리는 죽어서도 00지 묘라고 묘에도 내 이름으로 불려지곤 하니까.
아이들은 자기 물건에 이름을 써놓는데 그건 비단 아이 뿐만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집이며 차며 부동산, 현물에도 자신의 이름을 써놓는다.
이름으로 소유를 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름은 존재를 나타냄과 동시에 소유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도 될수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고유의 이름을 가진 것들 앞에는 소유를 나타내는 다른 이름을 붙이지는 않는다.
내 고양이 랑이 앞에 유채꺼라고 붙이지 않는 것처럼. 소유를 주장하지 않아도 되는 고유의 존재들.
이름이라는 것은 그 존재를 뜻하는 것이라면 이름을 가진 존재들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그렇다면 좀 더 주도적으로 살아도 되는 걸까.
이름 값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