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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유채 Feb 06. 2024

철권, 오스카와일드 그리고 아버지 #4

낙선소설

선우가 영종도에 가고 싶다고 미주에게 말했을 때, 미주는 하나도 친하지 않은 할머니 앞에 친자를 붙여야 하는 게 너무 싫은 ‘친’할머니네 집을 떠올렸다. 그리고 식은 밥이 떠올랐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구읍, 선우의 본가에 간 그날, 그의 어머니는 선우네 세 식구에겐 가마솥 불을 뺐다며 식은밥을 내주었다. 보리가 섞인 잡곡밥은 목이 막혔다. 미주는 진숙과 함께 국에 밥을 말아 먹었다. 선우가 밥 한술 뜨다 말고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열린 문틈으로 그의 어머니가 기르던 개에게 밥을 주고 있었다. 서울서 크게 사업을 한다는 이부 형이 선물한 개였다. 개밥은 뭉근하게 끓어 김이 모락모락 났다. 선우는 마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며 개 밥 주는 어머니를 바라봤고 진숙은 그런 선우의 등을 보며 오늘 아빠 생일인데.라고 미주에게 말했다. 사실 기억은 상당 부분 진숙에 의해 조작된, 그래서 양념이 첨가된 게 분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며느리와 손녀는 그렇다 쳐도. 아들 생일에 찬밥은 너무한 것 같다고 미주는 생각했다. 자신만 해도, 진숙과 같이 살 때는 아무리 늦은 저녁이라도 꼭 막 한 밥과 국을 차려줬었다. 진숙은 늘 사람은 따순 밥 먹어야 기운 낸다며 밥심이라고 말했었다.


 미주는 선우에게 영종도에는 왜 가냐고 물었고. 선우는 죽기 전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미주는 자신이 태어난 공덕동에 간 적이 있다. 선우가 도박판에서 집에 올 때면 사 들고 왔던 광장 앞 치킨집이 사라졌고, 슈퍼만 그대로 있었다. 미주는 슈퍼에서 막대사탕과 소주를 사 들고 효창공원에 가서 검은 봉지로 두른 소주병을 들고 병나발을 불었다. 그날 거기 왜 갔을까. 뭐가 힘들어서 그랬던 것 같은데 뭐 때문이었는지 기억도 잘나지 않았다. 그냥 누구나 다 있는 인생에서 힘든 시기였다고 미주는 어렴풋 기억했다. 선우가 자신이 태어난 영종도에 가자고 했을 때 선우도 그런 마음이었을까를 미주는 생각했다.      


 인생을 재편집해보세요. 소설가가 말했다. 미주는 아버지, 선우에 대해 떠올리면 인천 부둣가와 영종도 식은밥 같은 게 떠올랐다. 묻어두고 덮어뒀던 어느 구멍에서건 우울한 기억이 한없이 쏟아져 나왔다. 소설가는 마음의 정원에 잡초만 무성하다고 생각한다면 정원을 다시 가꿔야 한다고 말했다. 좋은 기억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앨범을 보라고 했다. 우울하다고 생각하는 대부분 사람들은 사진 속에선 웃고 있을 거라고 말했다. 미주는 빨간색 융으로 된 천에 금박으로 글씨를 입힌 앨범을 꺼내 봤다. 진숙은 오랜만에 집에 내려와서 사진을 왜 들춰보냐고 말했다. 진숙은 선우의 물건은 다 정리 했으면서 앨범은 정리하지 않았다. 친정의 반대로 친지들을 초대한 결혼식은 못 올리고 대신 구청에서 스무쌍이 합동 결혼식을 했다고 늘 불평하면서도 결혼식 사진을 꺼내 보는 그녀였다. 미주는 사진하나를 꺼냈다. 장발에 통이 넓은 맘보바지를 입고서 보잉 선글라스를 낀 선우가 유모차에 탄 미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백구두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미주는 사과머리를 하고 청색 멜빵을 입고 유모차에 앉아 있었다. 사진 속 아이는 웃고 있었다. 


 미주의 기억 하나가 톱니가 되어 사진 속 아이의 유치처럼 간질간질 솟아올랐다. 기억 속에 그녀는 선우의 등에 업혔었다. 선우는 미주를 업고 뛰고 있었다. 등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미주는 어릴 때 꼭 새벽에 아팠다. 그 해 유행했던 볼거리에 걸려 얼굴이 커다렇게 부풀어 올랐다. 선우는 뛸 때마다 꼭 잡아, 꼭 잡고 있어 하고 말했다. 미주는 아기 원숭이처럼 아빠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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