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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시작
녹차? 커피?
그냥 물 주세요.
나는 첫만남에 이런식의 대화로 시작한다. 첫만남이라는 (어색한 분)위기에서 내 생각이 떠내려 가지 않게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명같은 것.
따뜻한 물? 차가운 물?
아뿔싸.
나는 거기까지 미처 생각 못했다. 이 이야기의 시작이 어디인지, 너를 처음 만난 그날, 녹차인지 커피인지 묻는 너에게 그냥 물주세요라고 대답했던 그날이 이야기의 시작이라 쓰고 있지만, 이 모든 시작은 사실 산쪼메라는 라멘집에서 너에게 말없이 규동을 덜어주며 네 발목을 한참동안 바라본 그때가 맞다.
너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몇번이고 전화번호부와 메신저의 시간이 지난 빈 방들을 뒤적였지만 네 이름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고보니 네 얼굴도 기억 나지 않는다. 안경을 쓰고 키가 컸다는 것 정도. 희미한 무언가를 붙잡고 글을 쓸 때면 나는 내 기억이 온전한 것인지, 네가 정말 실존했던 인물이었는지, 허구인지 늘 그런게 헷갈린다.
나는 단지 알고 싶었다. 알고 싶다. 내가 왜 너의 발목을 한참동안이나 지켜봤는지. 아직까지도, 모든 게 흐릿해진 지금까지도 너의 발목에 대한 인상만은 점점 또렷해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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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대머리
항암을 마치고 6개월 쯤 지나면서부터 머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1년 째 되면서부터 머리라고 부를만큼 자라 바깥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풍성할때는 몰랐는데 막상 머리가 빠지고 나서는(머리카락과 머리는 왜 동의어 처럼 쓰이는 걸까) 수치심이 들었다.
나는 도대체 왜 창피한걸까?
사실 항암을 하는 중에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혼자 식사를 한적 있었는데 그때 원치 않게 주목받게 되면서 옆테이블 대화가 들렸다. 암환자인가봐, 혼자와서 먹네. 라고 한두마디 하는 그 소리가 들리면서부터 내가 머리가 없다는 것이 타인의 시선에서 이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대화는 대머리인 나를 탓한다기보다 그 장소에 있으면 안될 사물 혹은 사람에 대한 의아함을 표현한 말이 아니었을까?
사실 불행쪽으로 걸어가서 자조적으로 생각해보면 광장에 발가 벗고(실제로는 머리만 벗었을 뿐인데) 서 있는 기분. 하지만 나는 약간의 위트를 좋아하므로 남극이나 북극의 하얀 눈밭에 덩그러니 놓인 파인애플에 대해 에스키모인들이 발견하고 도대체 저 파인애플이 어디서 온 거야? 라고 말하는 걸 떠올리고 있었다(파인애플을 기리는 노래)
순전한 호기심으로, 내 이런 수치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생각하고, 또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인식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지 관망하면서 천천히 디저트까지 일곱 접시를 뿌시고 왔다.
이런 내 관조적 태도, 뒷짐지고 한가로이 상황을 내려다보는 태도는 문제가 될때도 많지만 가끔은 생존(을 위한 7접시의 음식)에 도움이 될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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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기분
너를 만났을 때 나는 민머리에서 1-2센치 머리가 자란 상태였다.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집에만 있으려니 갑갑한 마음에 시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도자공예클래스를 신청했고 교육 일정을 안내 받는(약간의 심사)날이었다.
요즘 기분은 어때요? 네가 물었고 그제서야 너의 눈을 바라봤다. 약간의 우울, 머리털이 없는 나보다 슬픔이 베인 얼굴이랄까. 그 순간 너는 나의 공허감에 나는 너의 우울에 스며들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왜 서로의 기분에 영향을 받는 것일까? 왜 이토록 나약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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