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4학기로 이루어지는 소설 특강에서 박상우 작가의 첫 질문은 소설을 왜 쓰는지였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한 후 소설을 왜 쓰는지 물었다. 나는 미처 준비하지 못해서 엉뚱하게 지인 소개로 강의를 듣게 됐다는 말과 소설을 꽤 오랫동안 써왔다고 대답을 얼버무렸다.
나는 왜 소설을 쓰는 거지? 생각해보면 나는 초등학교 1학년 시를 썼다. 그때의 기억은 눈부시게 남아있는데 동시의 삽화와 함께 봄에 관해 썼던 것 같다. 선생님이 칭찬을 해주셨다. 나는 그때 인정과 칭찬을 좋아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좀 별나게 좋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예를 들면 바른 자세로 앉는 법을 배울 때 그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유지하기 위해 애썼던 것 같다. 국어 쓰기 책의 따라 쓰는 글자를 쓰고 빈칸에 다시 쓸 때는 꺾어진 모양과 비율까지 그대로 쓰려고 노력했다. 색연필이 쓰다 보면 뭉툭해졌는데 그것 때문에 삐침 모양이 잘 써지지 않아서 속상했던 기억도 있다. 엄마가 중학교 때까지는 열성적인 소위 말하는 치맛바람 셌다. 둘째 이모나 막내 이모가 경기와 서울 사립학교에서 다 교편을 잡고 있어서 더 그랬다. 참관수업, 녹색 어머니, 학부모회에 가입해서 활동했다. 그래서 엄마가 참관을 오면 나는 선생님 한번, 높이 달린 복도 창문 너머로 엄마 한번 쳐다보며 수업했다.
칭찬과 인정의 욕구가 나를 쓰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내가 다시 글을 쓰기로 한 것은 유방암이라는 소식을 듣고, 다니던 방문 학습 교사 일을 그만두라는 의사의 권고 때문이었다. 나는 3기 유방암이었고 림프절 전이가 의심된다고 했는데 3기도 A와 B로 나뉘고 암의 크기와 전이 등 TNM(T는 원발소 primary Tumor, N는 소속림프절 regional lymph Node, M는 원격전이 distant Metastasis)으로 점수를 매겨 병기수를 구분한다.
총생검으로 했을 때는 3기라고 했다. 수술 후에 정확한 기수가 나온다고 했고 의사는 심각성을 말해줬다. 경각심을 갖으라는 의미였는데 내가 너무 태연해 보였기 때문이다. 메멘토모리. 나는 가끔 죽음에 대해 생각했기 때문에 죽는 것보다는 먹고 살 걱정이 앞섰다. 암에 걸려서도 하루하루가 걱정이었다. 의사는 수술 후까지 고려해서, 1년 정도 혹은 더 긴 기간을 염두해두고 쉬어야 한다고 했다. 항암과 수술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유지하는 환자들도 있었다. 나는 일을 병행하며 치료하고 싶었다. 1, 2차 항암치료까지 경과를 보고 결정하려고 했다. 머리가 빠진다기에 일하면서 쓰고 다닐 인모가발도 알아봤었다. 그런데 1차를 마치고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물음표로 바뀌었다. 할 수 있을까. 그리고 2차 항암을 마치고 못하겠다라고 바뀌었다. 구역감이 생각보다 심했다. 그리고 중간검사 후 나는 멘탈이 무너졌다. 8차 중 4차 항암을 마친 상태였다. 나는 항암치료를 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는 전이에 대한 공포가 더 컸다. 이 항암치료를 유지하며 생명을 연장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생 겪어보지 못한 고통이었다.
고통이란 것, 아픔이라는 것은 예측 가능했다. 30년 넘게 살아보니 감기에 걸릴 때는 똑같은 부위가 아팠고 몸살도 어느 정도 통증이 예측되었다. 그리고 복통 같은 배앓이, 치통도 그랬다. 나는 살면서 큰 수술은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녹슨 우산살에 찔려 손가락을 꿰매거나 넘어져 입술을 꿰맨 것을 제외하고는 그랬다. 그래서 이러한 고통은 통증 범위가 예측 가능했다. 그런데 생전 보도듣도 못한 통증들이 매일매일 성난 파도처럼 밀고 들어왔다. 죽음도 무섭지 않던 멘탈이 고통 앞에서 무너졌다. 어떤 약의 부작용인지도 모를(너무 많은 약을 먹고 있었으므로) 우울증도 같이 왔고 항생제를 처방전대로 먹지 않아서 무릎 통증도 심해졌다.
나는 새벽 내내 통증 때문에 깨어있는 날들이 많았다. 그때 나는 왜 소설을 쓰는지 생각했다. 나는 왜 소설을 쓰는 것일까. 무언가를 기록하기 위해서? 아니다. 소설가는 말했다 나를 들여다보는 구도 행위라고, 또 다른 소설가는 인생을 재편집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어떤 소설가는 발가벗고 발가벗기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모두 하나의 의미를 말하고 있었다. 인간 탐구, 인간 이해 정확히는 자신에 대한 탐구와 이해였다.
수필과 시만 쓰다가(고등학교 때는 인터넷 소설을 조금 쓰긴 했지만) 문학 소설을 쓰기 시작한 건 대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다. 소설의 이해와 평론 강의를 듣고 과제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희곡을 쓰면 ‘삶은 계란이다’ 같은 유머 코드를 섞어 코믹해졌고, 시를 쓰면 여름날 오이 고명이 올라간 콩국수처럼 산뜻해졌으며, 소설을 쓰면 빈 낚시터를 지키는 개처럼 우울해졌다. 우울한 것이 저수지 밑바닥을 긁어내듯이 한없이 나왔다.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그런 이유 때문이었으리라. 구도 행위이며, 나를 발가벗기는 과정이며, 인생의 우울을 재편집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10월부터 12월까지 한 학기 강의가 이제 끝났다. 나는 강의를 듣기 전 썼던 소설과 강의를 들은 후 쓴 두 편의 단편을 가지고 있다. 모두 나에게서 시작된 것인데, 작품이 주는 깊이감이 다르다. 전자는 얕아서 삶의 껍질을 혀끝으로 핥는 듯한 느낌이라면 후자는 껍질을 까고 그 안으로 과육이 주는 농밀한 맛을 느끼기 시작했다. 달거나 짰던 맛만 느꼈었다면 이제 막 플레이버(Flavor)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로 씹어 텍스쳐(Texture)를 맛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