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일주일간 입원을 하게 되었다. 좋지 않은 혈액검사 결과에 무척이나 당황했다. 한 달 전에도 검사를 했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달라진 수치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새벽 2시부터 아침 8시까지 응급실에 누워 열을 견뎌야 했다. 오한으로 침대가 들썩거릴 만큼 덜덜 떨었다. 남편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기가 힘이 들었다.
8시가 되어서야 병실로 이동했다. 1인실을 신청했지만 자리가 없어 6인 병실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응급실에서 꽂아 온 바늘은 새 걸로 갈아주어야 한다고 했다. 바늘을 뺀 손목에는 휑한 구멍 같은 바늘자국이 남았다. 그 뒤로도 세 번이나 링거 바늘을 바꾸고 혈액 검사 탓에 여섯 번이나 주삿바늘에 찔려야 했다. 바늘을 꽂은 자리 중에 두세 군데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 버렸다. 아프다는 생각보다 멍든 팔을 가족들에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간병을 해 주던 엄마도, 남편도, 울산에서 나를 보러 온 아빠도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루에 몇 병씩 맞는 항생제 주사로 증상은 생각보다 빨리 호전되었다. 혈액검사 수치도 조금씩 정상에 가까워졌다. 그러는 동안 나는 잠들고, 밥을 먹고, 정신이 나면 병원 사람들을 구경했다. 새삼스레 의사와 간호사라는 직업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누군가의 주치의이자 담당간호사로서 분주히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존경스러웠다. 하지만 이따금씩 병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에 진절머리가 나기도 했다. 시간에 맞춰 반복되는 수액과 주사, 약 복용, 그리고 또 식사.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하는 하루하루는 사람으로 하여금 회의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주일 후 퇴원을 하게 되었고, 그날도 병원 로비엔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했다. 외래 진료를 보러 온 사람들, 나처럼 입퇴원 문제로 마음이 힘든 사람들까지 모두가 각자의 표정을 하고 같은 장소를 오갔다. 아빠 차를 타고 병원을 나오며 입원 같은 건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바깥공기가 무척이나 낯설었고, 아마 그 느낌이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사실 크게 아프거나 입원했던 것이 이번 한번뿐만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이 사건이 뭔가 좀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평소에 믿고 있던 것들이나 안심하던 것들도 조금만 무심해지면 언제든지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음이 절실히 와닿았다. 그래서 퇴원 후에는 꽤 많은 것들을 신경 쓰기 시작했다. 체중이나 식습관, 하루 운동량 같은 것들이 평소보다 조금 더 예민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병원에서 여러 아픈 사람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저마다의 병과 통증으로 언제 병원에 들어와서 언제 나갈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은, 병들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큰 걱정이자 슬픔이었다. 그래서인지 병원의 밤은 좀 더 일찍 찾아오고 좀 더 길었다. 마주치면 잔잔한 웃음을 나누면서도 혼자가 되는 시간에는 모두들 침묵함이 느껴졌다. 아프다는 것은, 그토록 무거운 일이었다.
어쨌거나, 그날은 유난히 열이 나는 날이었다.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고 숨이 너무 차서 산소호흡기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던 날이었다. 나 하나 때문에 가족들이 돌아가며 병원에서 밤을 새워야만 했던 날이었고, 깜박거리며 사라지던 열 같은 것들이 하루종일 머리를 어지럽히던 날이었다. 아프다는 것은 나에게나 나를 둘러싼 타인에게나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고, 부정적인 생각과 낫지 않는 통증은 평소에는 멀쩡한 사람들의 마음마저 괴롭혔다. 현재의 내가 건강하다면 그것에 감사하고 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실감 나는 10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