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우리에게 제대로 된 가을이 있었던가?
발에 아무렇게나 밟히는 낙엽들도 사실은 우리가 그토록 바랐던 봄과 생명의 흔적이었다는 것을 너는 기억하고 있을까. 이미 우리들의 계절은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과 겨울 그 어느 중간에 와 있고, 그리하여 우리는 너무도 생생하면서도 찬란하게 빛나던 그 푸른 계절을 잊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이따금씩 생각했어.
푹 푹 찌는 여름에 처음 만난 우리는 괜히 뽀얀 막걸리 한 잔에도 낭만에 기댈 줄 알았고, 마포역 어느 나무 아래에서 무거운 베이스기타를 어깨에 짊어지고도 하얗게 웃었더랬어. 그때의 네 미소는 부서질 듯 빛났고, 나는 그렇게 부서지던 빛 같던 너의 표정이 좋았어. 좋은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진심으로 좋은 일이었지.
그저 여름방학의 열병 같은 사이는 아니었어 그렇지? 우리는 그 여름을 지나 가을 겨울을 항해하며 길을 걷고 걸었어. 나는 그걸 영원한 산책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너는 아마 모를 거야. 멈추지 않는 발걸음과, 우리의 앞에 끊임없이 주어지던 길 그리고 또 길들을 나는 늘 사랑해 왔어. 지금도 걷고 있는 이 길은 왠지 끝나지 않을 듯해. 그래서 나는 줄곧 사랑에 빠져있는 걸지도 몰라.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어느 순간 우리에게 제대로 된 가을이 있었던가? 너무도 무더운, 아니 심지어 너무도 뜨거워서 이 모든 차가운 마음들을 녹이는 여름과, 반대로 아주 딱딱한 얼음처럼 꽁꽁 언 감정들로 가득한 겨울이 있을 뿐이야. 사랑이란 그런 걸까, 뜨거움과 차가움 이 두 가지의 감각이 내 몸과 마음을 데웠다 식혔다 하는 것이 사랑일까 싶을 정도로 가을의 선선함은 이미 사라져 버렸어.
가끔은 가을이 그리워지기도 해. 어느 순간 시간의 중간에 서고 싶어지면, 나는 그다지 덥지도 춥지도 않은 담백한 이 계절을 피부 깊숙이 느끼고 싶어 져. 말없이 서로를 바라볼 수 있고, 조금 떨어져서 너의 옆모습을 보는 것도 좋아서 그래. 이미 우리는 아주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때로는 꽁꽁 언 마음으로 서로를 미워하기도 하지만 그걸로도 충분하니까.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너를 가득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는 나는, 우리가 이미 마음 깊숙이 묻어둔 채 잊어가는 가을을 기다려. 사실은 아주 많이 기다려왔다고, 그 흔들리는 계절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