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평균 3등급이 낫다

어느하나 뒤쳐지지 않게

by 남형주


추상 #1


나는 행복 따위의 추상적인 단어를 필두로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는 때때로 불편을 경험한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소통을 복잡하게 만든다는 점이고 둘째는 상대의 결핍이 잘 드러난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얘기를 한다고 느끼거나, 대화가 산으로 간다고 느끼는 경우를 관찰해 보라. 상당 부분은 추상적 개념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때때로 서로의 얼굴을 붉히게 만들기도 하며 감정을 상하게 하기도 한다. 누구나 겪어본, 앞으로도 겪을 상황이다.



추상 #2

매끄러운 소통을 위해서는 대전제의 합의를 필요로 한다. (세계 시차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지구가 둥근 것에 동의해야 하는 것처럼) 이것이 잘 이루어진 경우에 우리는 서로 다른 의견을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인지하게 된다. 하지만 추상적 개념에서는 공통된 하나의 단어조차도 개개인마다 해석하고 이해하고 정의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채로 소통하게 된다. 이것은 합의의 과정을 방해하기도 하며 언쟁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오류가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 알기 위해서는 유형과 무형의 단어가 대화에서 각각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유형의 단어


‘돌덩이는 단단하고, 돼지는 뚱뚱하고, 정장은 불편하다.’ 이 명제에 동의할 수 있는가? 아마 그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돌덩이가 쇠보다 단단한가?, 돼지가 하마보다 뚱뚱한가?, 정장은 군복보다 불편한가?' 이처럼 유형의 단어를 말할 때에 우리는 명제의 사실 여부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사실과 인식의 관점으로 이해한다. 예를 들어 '돌덩이는 사과보다 단단하다.'의 경우 누구나 간단하게 증명할 수 있다. (사과를 돌덩이에 던지거나 돌덩이를 사과에 던지거나) 이것은 사실이며 참이다.

반면에 '돌덩이는 단단하다.'라는 것은 어떻게 증명할 것이며, 어떻게 참으로 만들 것인가? 이것은 증명할 수 없고, 참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명제에 동의하고 문제 삼지 않는다. 물질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형의 단어의 경우 따로 약속하지 않아도 대화속에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 진다.



무형의 단어


무형의 단어는 어떨까. 이것은 직관적이지 못하고 실체가 없지만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각자의 가치를 입혀 단어의 의미를 정의하게 되는데 예를 들어 어떤 한 수학자가 농구공이 네모난 것임을 주장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하지만 어떤 한 예술가가 흰 캔버스를 까맣게 칠한 뒤 사랑은 검은색이라고 정의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추상의 개념은 누구나 유연하게 주무를 수 있다. 때문에 내가 전달하는 단어의 의미가 상대에게도 같은 의미로 전달될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에 가까운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대화가 산으로 가기도 하고 같은 주제로 서로 다른 얘기들을 하기도 한다. 이는 소통의 걸림돌 역할을 한다.



그래야만 하는 것


위에 말했듯 무형의 단어는 어떠한 것도 갖다 붙일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무의식 중에 우리는 교묘히 가치를 조작하고 변형시키며 그것을 단어에 투영시키게 된다. 행복이라는 가치로 예를 들어보자. 행복은 여럿 구성요소들을 필요로 하고 그 요소들이 삶의 균형을 맞추며 유지될 때 우리는 만족스럽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느 한 구성요소가 내가 가지지 못한 것, 앞으로 가지지 못할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고 치부하며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다. (대개 물질적인 것에 그렇다) 만약 가지지 못한, 못할 것이 높은 가치를 가진 것임을 인정하게 된다면 그 과정에 자아가 불가피하게 훼손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행복이 아니길 바란다. 행복이 아니어야 하고, 아니어야만 한다.



우리는 바람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진실로 결부시킨다


평균 이하의 외모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랑에 외모가 전부가 아님을 증명하며 살고, 평균 이하의 재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 돈이 전부가 아님을 증명하며 산다. 이런 현상이 긴 시간 이어져 생각이 굳어지게 되면 그 왜곡된 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그것만이 세상의 진실한 가치이자 본인만의 견실한 정체성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 후에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특정 사례나 사건, 정보들을 켜켜이 쌓아 합리적 이유를 만들고 이것은 진실로 믿게끔 만드는 데에 큰 작용 한다.(피해의식에 비롯된 이러한 확증편향적 사고가 신념으로 자리 잡았을 경우에는 집단으로 이념을 만들어 마치 사회전체를 거대한 악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근시안적 사고는 하루하루 살아갈 양분이 될 수 있겠으나 거시적으로는 본인 스스로의 발전 가능성에 제약을 두는 행위임에 틀림없다.



바람의 모순


사람들은 물질 이외의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돈보다는 건강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외모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돈과 외모가 세상의 전부가 아닌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한들 반대로 오로지 나의 건강만이, 나의 마음만이 세상의 전부가 되는 것 또한 아니지 않은가. 적어도 나에게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따위는 관심 밖의 일이다.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은 이유


우리가 살게 되는 실제 삶은 양자택일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물질과 비물질, 유형과 무형을 임의의 한 직선 양극단에 두고 행복을 위해 어떠한 것을 선택할지 고민하기도 한다. 앞서 말한 돈과 건강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어야만 하는 체스게임 같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많은 부가 건강을 악화시키는 것도 아니며, 적은 부가 우리의 안녕을 도모하지도 않는다. 하물며 이것은 마음대로 취할 수 있는 것 또한 아닌 것을 인지해야 한다.



인생은 평균 3등급이 낫다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여러 요소들을 균형감 있게 갖추어야 할 뿐이다. 그것들이 어떠한 형태 인지는 중요치 않다. 세상에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람도 은행에 적금을 들고, 세상에 돈이 전부라는 사람도 소중한 이의 죽음에 가여운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어느 하나의 요소를 0에 가까운 값에 수렴하며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없다. 더 이상 행복의 가치를 저울질하지 말아야 한다.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가치라는 명분 뒤에 숨겨 놓은 나의 보잘것없는 자아와 결핍을 마주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요소들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지는 못할 수 있겠으나 어느 하나 뒤처지지 않게끔 성장하는 데에는 기여할 수 있다.


수학만 9등급인 서울대생은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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