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법을 몰라서요 #04]
아직도 제 몸에 배긴 개미 습성을 못 벗은 것 같아요. ‘오늘 안에 저 쿠크다스를 여기까지 옮겨야 해 !’를 정해두고 그 목표를 향해 성실하게 일하는 게 당연한 사람 있잖아요. 그걸 당연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항상 성실할 수 있었던 건 물론 아니고요. 성실하지 못했던 순간이나, 성실해지고 싶지 않았던 순간에 필요 이상으로 불행하다고나 할까요.
초등학교 다닐 때는 뇌가 말랑말랑할수록 선행학습 많이 해두라고 해서 엄마가 학원에 보냈고, 중학교 때는 외고가 붐이었던지라 단어장 좀 넘겼고, 고등학교에 가서는 대학 가야 하니까 무조건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은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대학 가서는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은 전공을 골라 공부했고, 졸업해서는 전공을 살려 갈 수 있는 회사 중 처우가 괜찮은 곳에 들어가기 위해서 1년 반 정도를 취준해서 회사에 들어갔어요. 이제껏 뭔가를 계속해오긴 했는데 말이에요. 이런 질문이 생기더라고요.
‘그럼 이 다음은 뭐지? 왜 부어도 부어도 안 차오르지?'
명상도 처음 배울 때에는 그 독을 채우기 위해서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 마음의 평정? 필요하지. 지금부터 40분? 40분 동안 나는 제대로 평정함을 느껴볼 거야. 이 시간을 제대로 보낼 거야' 이런 식이었어요. 웃긴 거죠. 쉬러 와서는 그 시간 내내 쉼으로의 달리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명상은 30분이 끝나길 바라며 지금을 참아내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게 명상이라고. 질문이 쏟아졌어요. 지금 여기에? 나는 항상 지금 여기에 있었는데? 내가 지금 여기에 있지 않았다면 대체 어디에 있었다는 거지? 계속 생각에 빠졌어요.
내 주의 자체를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게 처음이잖아요. 내 머릿속을 바라본다는 게 전혀 정적이지 않았어요. 계속 생각에 정신을 뺏기고 있을 때 귀신같이 이런 가이드가 주어지는 거예요. ‘생각을 알아차린 다음에는 호흡의 감각으로 돌아가세요.’ 콧구멍으로 들어가는 숨이 느껴지더라고요. 내쉴 때는 콧구멍 바로 뒤쪽에 따뜻한 바람이 누르는 느낌이 들었어요. 코가 짧아졌다가 길어지는 느낌? 이 느낌이 너무 생소하고도 재밌어서 계속해서 집중하게 됐어요. 한 번- 두 번- 세- 번. 내 호흡에 집중하는 30초, 길어봐야 1분 남짓한 시간 동안 어딘가로 가야만 한다는 그 익숙한 느낌이 없었어요. 아주 오랜만에 쉰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어딘가로 가기 위한 가장 좋은 전략은 가장 체계적으로 지금을 잊는 방법이기도 했어요. 저는 미래나 과거에 오래 살았던 것 같아요. 어딘가로 가기 위해서 과거의 내 모습에서 문제를 찾거나, 거기에서 잘했던 것을 떠올려 곱씹어보고, 미래의 어딘가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투두 리스트를 세웠어요. 하지만 삶 전체가 어딘가로 가기 위한 전략일 수는 없잖아요. 우리는 유한한데. 지금, 이 순간도 유한한데. 어디에 가기 위해서 계속 걷는, 목표 중심적 삶에 일시 정지 기능이 생긴 거죠.
명상이 알려준 쉼은 ‘지금 여기’에 있었어요. 지금이라는 게 있구나. 나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구나. 아, 존재한다는 게 이런 걸까? 마치 아이가 된 것 같았달까요. 전에는 ‘이미 너는 온전해’라는 말이 공허하게만 들렸거든요. ‘긍정적으로 생각해봐’라고 말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그 순간이, 그리고 그 순간의 제가 이미 온전하더라고요.
매번 잊어버려요. 내가 붙들어보려고 애써도 모든 게 변화한다는 사실을. 매일 잎은 떨어지고, 강아지는 새로 태어나고, 누군가 죽기 때문에 붙들려고 해도 붙들 수 없는 지금이 너무 소중하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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