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안녕은 타인의 선한 행동에 빚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점심때 애들을 데리고 애슐리에 갔다.
방학이라서 그런지
평일인데도 초등학생들이 많았다.
단체로 온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아이들과 내가 먹을 와플을 만들러 갔는데,
그곳에 초등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있어,
후퇴를 했다.
잠시 뒤 다시 가보니,
두 명만 남아있었다.
와플 반죽통 앞에 있던 한 친구는
자신의 키보다 더 높이 있는 반죽 펌프를
팔이 덜덜 떨릴 정도로 힘겹게 누르고 있었다.
내가 펌프를 대신 눌러 와플 반죽을 채워 주었고,
내 반죽도 담았다.
그때 와플 기계 앞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보니 또 다른 친구가,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쥔 채 서 있었다.
와플 기계 뚜껑을 닫으려다,
뜨거운 기계에 손가락을 덴 것이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어른이 서둘러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내가 반죽을 짜준 친구는,
와플 기계 앞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친구의 반죽 통을 받아서
와플을 만들고 접시에 담아주었다.
손이 덴 친구는 그곳을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고,
그 친구를 데려갔던 어른은 다른 어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른 어른은 울고 있었다.
아마도 손이 덴 친구의 선생님이 아닐까 싶었다.
울고 있었던 어른은,
애슐리 입구 쪽에서 통화를 했다.
아마도 손이 덴 친구의 부모님과 하는 것이 아닐까.
마음속에 아쉬움이 밀려왔다.
펌프를 누르기도 힘든 작은 친구들인데,
와플 기계가 그들에게 위험할 거란 생각을,
왜 그때는 못했을까?
조금만 주의 깊게 봤더라면,
그래서 그 친구의 와플도 내가 만들어 주었다면,
아이는 다치지 않았을 것이고
선생님도 울 일이 없었을 것이고,
아이 부모님도 속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했던 작지만 좋은 행동이,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큰 불행을 예방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행동이,
누군가를 다치지 않게 했고,
누군가를 슬프지 않게 했으며,
누군가를 구했을지도 모른다.
도와줄 때 느끼는 뿌듯함과
돕지 못했을 때 느끼는 아쉬움은,
신이 부여한 인간의 속성일까?
진화를 통해 만들어진 인간의 특성일까?
어디서 기인했든,
아쉬숨이나 뿌듯함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그런 존재,
즉 사람들과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할 존재임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돕는 일은,
우리 존재의 특성대로 사는 일이며,
자신을 위하는 일이다.
뿌듯함이라는 좋은 감정을 우리에게 선물로 남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내가 여러 행복을 누린 것과,
겪을 수도 있었던 불행을 겪지 않은 것은,
누군가의 선행 때문은 아닐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몇몇 위인들은
큰 일을 하고 우리에게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많은 수를 차지하는 이들은
우리에게 행복의 씨앗을 남긴 줄도 모르고 떠난 이들이다.
우리도 그들의 도움을 모르는 이유는,
도움이 크지 않아서 일 수도 있겠지만,
도움이 없었을 때 발생했을 피해와 불행을
우리는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안녕은 타인의 선한 행동에 빚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음에 애슐리에게 간다면,
와플 기계 주변을 주의 깊게 볼 것 같다.
특히나 키 작은 친구가 서성이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선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에 좋기 때문이다.
이기를 위한 이타라고 하면 될까.
읽어보지 않은 소설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죽기 전에 한 번은 읽어보고 싶다.
알랭드 보통 아저씨 책에 나와서 알게 된 구절이다.
조지 엘리엇이 쓴 소설,
'미들마치'의 마지막 부분인데,
책을 조만간 읽겠다면 잠시 눈을 감아도 좋다.
그녀의 존재가 주위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은 끝없이 멀리 퍼져나갔다. 세상의 선은 역사적으로 거창하지 않은 행동들 덕분에 확장되기 때문이다. 당신이나 나나 더 나쁜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렇지 않았던 것의 반은 드러나지 않은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다 지금은 사람이 찾지 않는 무덤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 덕이다.
:: 미들마치, 조지 엘리엇. 알랭드 보통의 '불안'에 인용된 구절
그래,
꼭 누군가를 돕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사는 것만도,
훌륭한 인생이 아닌가!
난 오늘을 충실히 살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