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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씨 Dec 04. 2023

즉흥의 자유

라고 쓰고 무계획이라고 읽는다

가끔 여행 갈 일이 생기면 숙소는 주로 에어비앤비를 이용하는 편이다. 일단 잘하면 가성비 좋은 숙소를 찾을 수도 있고, 익숙해지니 제일 편한 방법이어서다. 편하기야 호텔이 편하겠지만, 비싸기도 하고 여행을 주로 혼자 하다 보니 싱글룸 찾기도 힘들어서 에어비앤비에 정착한 것 같다. 검색할 때 필터링하는 기준은 ‘슈퍼호스트인가?’와 ‘프라이버시가 존중되는가?’ 두 가지 정도다.


처음부터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친구나 지인과 일정 맞추기도 어렵고, 한두 번 해보니 혼자 다니는 것이 여간 편한 것이 아니지 않나. 혼자 하는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은 내가 움직이고 싶을 때 움직이고, 쉬어가고 싶을 때 얼마든지 눌러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흥의 자유’랄까?


이 즉흥의 자유는 목적지를 정할 때부터 시작된다. 안도 타다오 영화를 보고 나오시마에 가야겠다고 결심하고, 마스다 미리 에세이에 나온 귤 식빵 사진을 보고 그 주말에 마쓰야마에 다녀온 것처럼. (결국 귤 식빵은 찾지 못했다 ㅠ)


나오시마


나오시마에 다녀온 건 대략 4년 전쯤. 동네 영화관에서 안도 타다오의 작품과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다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지중미술관(지추미술관)을 실제로 보고 싶어졌고, 영화가 개봉한 그해 여름 휴가지를 나오시마로 정했다. 나오시마를 검색하다 보니 마침 3년에 한 번 열리는 세토우치 국제예술제 기간과 겹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중미술관


세토우치 트리엔날레는 나오시마 외에도 쇼도시마, 다카마쓰 등 몇 개의 섬에 걸쳐 진행되는데, 관광객이 많이 찾지 않는 작은 어촌 마을들의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는 축제인 것 같았다, 트리엔날레 패스포트라는 것이 있으면 가고 싶었던 지중미술관과 그 유명한 이우환 미술관 할인도 받을 수 있고, 크고 작은 섬들의 구석구석에 설치된 현대 미술 작품을 돌아다니며 스탬프도 찍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내친김에 바로 패스포트를 예매하고, 휴가 기간 내내 트리엔날레 관람과 함께하기로 했다.


세토우치 트리엔날레 2019


일단 공항이 있는 오카야마나 다카마쓰로 비행기를 타고 가서 나오시마나 쇼도시마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비행기를 알아보니, 오카야마행은 너무 이른 아침에 출발하기에 한 시간이라도 늦은 다카마쓰행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숙소도 다카마쓰에 (역시 에어비앤비로) 잡았다. 그때만 해도 검색이 되는 숙소가 많지 않아서 할 수 없이 2층 침대가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예약했다. 예약하고 나서 온라인으로만 연락을 해봐도 친절한 호스트인 걸 알 수 있었다. 출발하기도 전에 근처에 아침 식사할 만한 곳 등 이것저것 물어보니 여기저기 추천 목록을 뽑아서 보내주기도 했다. 호스트 한 명과 두어 명의 스텝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도착해 보니 체크인 장소와 숙소가 조금 떨어져 있었다. 체크인 장소는 한 영어회화학원 이었다. 호스트는 그 학원 강사고, 스텝은 거기 수강생인 것 같았다. 나에게 안내를 해준 건 스텝이었다. 그녀도 나도 서로 영어가 짧지만 (또르르) 보여주는 안내 자료가 워낙 정리가 잘 되어 있어 쑥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친절은 마음에 있는 것.


다카마쓰에서의 아침


다카마쓰에 둥지를 틀고 본격적으로 트리엔날레 관람에 나섰다. 공항에서부터 이미 관람은 시작되었지만.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들도 좋았지만, 배를 타고 들어간 작은 섬마을 곳곳에 자연환경과 어우러지게 설치된 작품들이 특히 좋았다. 폐가로 보이는 가옥을 활용한 작품들도 있었고, 깊은 숲 속의 나뭇가지 하나하나에 작은 종들을 소원이 적힌 쪽지와 함께 매달아 바람이 불 때마다 아름다운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게 한 작품도 있었다.


Funny Blue (Veronique Joumard)
La forêt des murmures (Christian Boltanski)


트리엔날레 개최지 중 메기지마라는 섬은 ‘도깨비 섬'이라는 별명이 있다고 한다. 그 이름에 걸맞게 섬 중간에 있는 산 거의 정상(내가 느끼기엔 정상이었다)에 있는 동굴 중심부에 다양한 도깨비의 모습을 한 작은 석상과 타일들을 엄청나게 모아놓은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메기지마에서는 지역 주민들로 보이는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도 안내 업무를 하고 계셨는데, 앞에 말한 동굴 도깨비 작품까지 어마어마한 등산을 해야 하는 걸 까맣게 모르고 무모하게 걸어가려 하는 나를 산꼭대기까지 태워다 주기도 하셨다.


Oninoko Tile Project (Oninoko Production)


또 다른 전시 공간에서 안내 업무를 하는 어르신도 서툰 영어로나마 친절히 설명해 주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에, 일본어는 한마디도 말할 줄도, 읽을 줄도 모르면서 무모하게 여행을 강행하는 내가 살짝 죄송하기까지 했다. 동굴 도깨비 작품을 보고 내려오는 내게 그 동굴 가보았냐고, 어떠냐고 물어보시는데 제대로 대답해 드리지 못해 또 죄송했다. 담당 구역에서 안내하느라 따로 구경할 시간이 없어서 보고 싶은데 궁금하고, 그래서 물어보신 걸 텐데….


이쯤 되면 간단한 일본어 정도는 좀 배워야 하지 않나 싶지만 또 언제 즉흥적으로 떠나게 될지 모르고, 이제 와서 배운다고 머리에 들어오기나 할지 싶어서 아직 미루고, 미루고만 있다.


남의 나라말을 뭘 또 공부해야 할지 고민은 일단 뒤로 하고, 이번 주말은 무료 공연 당첨된 김에 또 즉흥적으로 통영 1박 숙소를 예약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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