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인 중독자의 일상
매일 아침 출근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드립백으로 커피를 내리는 것이다. 주기적으로 비축해 놓는 드립백 하나를 꺼내어 490밀리리터짜리 보온 머그를 반쯤 채울 정도로 커피를 내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인다. 한 시간이 넘는 출근길 내내 몽롱했던 정신이 조금은 깨는 것 같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부쩍 차가워진 바람을 맞는다. 비로소 본격적으로 일과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다시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은은하게 퍼진 커피 향이 느껴진다.
출근하지 않는 주말과 휴일에는 사다 놓은 홀 빈 원두를 전동 그라인더에 갈아서 직접 내려 마시는 핸드드립 커피를 즐긴다. 종이 필터를 자기로 된 드리퍼에 깔고, 분쇄한 커피 가루를 담고, 드립 포트로 뜨거운 물을 부어서 서버에 커피를 내린다. 유리 재질의 서버에 똑똑 떨어지는 커피를 아직 잠이 덜 깬 눈으로 가만히 바라본다. 다 내려진 커피는 보온 머그에 옮겨 담는다. 커피가 다 내려지면 사용한 도구들을 정리하고 커피 찌꺼기도 치워야 하고.... 제법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요즘은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도 많이 나오고 세상 편하다는 캡슐 커피도 있지만, 굳이 핸드드립을 고집한다. (고집이라고 하니 뭐 대단한 애호가라도 되는 것 같네. 그 정도는 아닌데.) 약간의 시간과 수고를 들여 내가 마실 커피를 직접 준비하는 동안, 안 그래도 늘어지는 주말이 더 늘어지지 않도록 감각을 깨우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하루의 시작을 늘 커피와 함께한 지는 약 20년. 처음에는 캔 커피, 믹스커피 할 것 없이 카페인을 섭취(?)할 수 있으면 되었다. 왠지 모르게 아침부터 카페인이 들어가지 않으면 하루 종일 정신이 흐릿한 것 같았다. (나중에 든 생각인데, 커피를 마셔야 정신이 드는 느낌은 카페인보다는 커피의 맛과 향 때문인 듯하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여기저기 커피 전문점이 무수히 많아지고, 에스프레소 커피가 대중화되고, 자연스레 다양한 커피를 접하면서 나름 취향이라는 것도 생겼다.
커피를 오래 마시다 보니 그 취향도 조금씩 달라진다. 더 예민해진다고 해야 할까? 예전에는 커피는 역시 커피다워야 한다며 무조건 진한 커피를 찾고는 했다. 진짜 커피다운 것이 어떤 건지도 모르면서, 쓰디쓴 에스프레소를 들이키며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요즘은 맛이 진하고 쓴 것보다는 향이 산뜻하고 약간의 산미가 느껴지는 부드러운 드립 커피를 선호한다. 가끔 사무실에 드립백이 떨어지면 아래층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사다 마시기도 하는데,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평소에 마시던 드립 커피보다 확실히 향과 맛이 덜한 느낌이다.
앞서 말한 쓰디쓴 에스프레소의 기억은 정말 맛있는 커피를 경험해 보지 못해서였다는 걸 알게 된 카페가 있다. 제주도에 있는 ‘커피템플'이라는 곳이다. 한라산 끝자락 영평길 중선농원 감귤밭 옆에 은둔자의 요새처럼 자리 잡은 곳으로, 조금 외진 곳이지만 이미 유명해서 대기를 해야 할 때가 많다. 운이 좋아 바로 옆에 있는 갤러리가 전시 중이라면 천천히 관람하면서 기다리면 된다.
긴 대기 시간을 지나 자리를 배정받고 커피를 주문한다. ‘수퍼클린 에스프레소’라는 메뉴가 눈길을 끈다. 와인잔을 본떠 소믈리에가 디자인한 에스프레소 잔에 담아준다. 직원이 설명해 준 대로 바로 마시기보다는 한 번 휘저은 다음 맛보면 쓴맛보다는 고소한 맛이 조금 더 난다. 절반쯤 남았을 때 함께 나온 각설탕을 섞어 마시면 진하고 달콤한 에스프레소를 맛볼 수 있다. 평소 커피를 즐겨 마시면서도 쓰기만 한 에스프레소의 기억이 너무 강렬하여 (멋모르고 허세 부리던 시절 이후로는) 잘 마시지 않던 메뉴였다. 즐기는 방법을 잘 몰라서이기도 했겠지만, 확실히 전에 맛보았던 에스프레소와는 달리 기분 나쁜 쓴맛과 텁텁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카페인이 필요해서 들이키는 게 아니라,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천천히 음미하는 커피의 경험은 사실상 그 때가 처음이었다.
매일 아침 하루의 시작을 도와주는 드립 커피 한 잔이든, 여행 중 한 번씩 즐기는 여유든, 커피(맛있는, 중요!)는 언제라도 나의 감각을 살아나게 해주는,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