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주말답게
스스로 하루를 밀고 나간다고 느껴본 게 언제였더라. 알람이 울리면 한 번에 일어나본 기억도 희미하다. ‘다시 알림 (스누즈)’ 버튼을 대여섯 번은 누르고, 결국 애초에 맞춰놓은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겨우 일어난다. 거의 반수면 상태로 씻고 옷 입고 머리를 정리하고 집을 나선다. 다만 몇 분이라도 단축하기 위해 얼굴에 바르는 것도 최소한으로 하고, 최대한 입기에 간편한 옷으로만 고르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스타일도 고정되어 버렸다. 억지로 발걸음을 옮겨 버스에 몸을 싣는다. 한두 정거장 지나서 바로 기절, 한 시간을 넘게 숙면을 하면 이내 한강 다리를 건너 고속터미널역에 도착한다. 물론, 제때 못 내려서 되돌아온 적도 몇 번 있다. 지하철로 갈아타고 바로 다음 역에서 내린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한 잔 내려 마시는 커피 향에 정신을 차린다. 카페인에 의지해 질질 끌려다니는 하루하루를 보낸 지 너무 오래되었다.
월화수목금 출근을 해야 하는 평일에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수동적인 일상을 살지만, 그래도 쉬는 날에는 되도록 내 방식대로 하루를 끌고 나가려고 노력한다. 그 방법의 하나는 미리 이른 시간부터 일정을 만들어놓는 것이다. 설 연휴 셋째 날 일요일(2월 11일)은 아침 일찍부터 머리를 하러 갔다.
알람 맞춰놓은 시간보다 무려 한 시간 일찍 일어났다. 여기서 일어났다는 것은 단순히 잠에서 깼다는 뜻이 아니다. 아무 일정 없는 주말이라면 눈을 뜨고도 한참을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의미 없이 유튜브나 넷플릭스에서 이미 본 영상을 무한 반복 재생시켜 놓고 멍을 때리고 있을 것이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고자 설날 다음날 가장 이른 시간에 미용실을 예약해 두었다. 갈 때가 되었기도 하고.
보통은 예약 전화를 한 날과 예약일 전날 총 두 번 정도 알림 문자가 오는데, 이날은 예약 시간으로부터 두 시간 반 전에 한 번 더 왔다. 아무래도 연휴 기간인지라 많은 노쇼(no-show)가 우려되어 그런 듯하다. 그 마지막 리마인더 문자 오는 소리에 눈을 뜨고 심지어 바로 침대를 벗어났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일어난 것이 언제였던가. 연휴 첫째 날인 금요일과 설날인 토요일 내내 뒹굴며 숙면을 한 덕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오랜만에 미용실을 간다는 기대감이었을까.
워낙 게으른 탓에 남들보다 외모에 그렇게 신경을 쓰지는 못하지만, 미용실 가는 것은 좋아하는 편이다. 머리 하러 가는 날은 어쩐지 기분이 좋다. 서비스를 받는다는 느낌이 좋아서일까. 나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내가 어떤 사람이든 신경 쓰지 않는다. 어디에 살든, 어떤 직업을 갖고 있든, 소득 수준이 어떻든 그들은 항상 친절하다. 꼼꼼한 시술을 받고, 샴푸를 받고, 아로마 테라피와 두피 마사지를 받으며 그 순간만큼은 꽤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한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돈 내고 서비스받는 건데 뭐 그렇게까지 생각하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평소에 자신이 전혀 특별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은 다르게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머리를 하고 성북천을 따라 십오 분 여를 걸어 몇 번 가보았던 동네 카페에 도착했다. 따뜻한 라떼를 주문하고 구석 테이블에 앉으려는데, 바로 옆 벽면 선반에 마스다 미리 책이 잔뜩 쌓여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노트북에, 공책에 뭐에 바리바리 싸 온 것들은 일단 제쳐두고, 가장 위에 있는 ‘아무래도 싫은 사람'이라는 만화책을 집어 들었다.
주인공 수짱은 카페 점장이다, 차분한 성품에 요리를 좋아하고 직장에서도 제법 신뢰받는 편이지만, 도저히 견뎌내기 힘든 직원 한 명 때문에 매일매일 스트레스를 받는다. 수짱의 친척 동생 아카네는 이제 서른 살인 평범한 직장인 여성이다. 여동생이 먼저 결혼하게 되자 어머니로부터 매일 결혼에 대한 압박을 받는 아카네. 어머니에게 짜증은 나지만 아카네 자신도 성취감 낮은 일과 앞자리에 앉은 진상 선배 때문에 얼른 결혼해서 퇴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이쯤에서 어딘가 내 이야기 같지 않은가.
결혼에 대한 압박을 제외하고 (내 부모님은 이미 체념한 듯), 나 또한 이미 경험해 보고 뼈저리게 공감할 만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지금은 혼자 사무실을 지키는 시간이 많아 사람과 관련한 스트레스는 별로 없는 편이지만, 이전 직장에서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많이 겪었고, 내가 힘들게 한 사람도 많았다. 아카네처럼 일에서 성취감을 얻은 적도 거의 없었다. 그런 일상 속에서 자존감을 높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세상에 스트레스 안 받는 직장인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나도 잘 모른다. 오죽하면 미용실에서 돈 쓰고 남들 다 받는 서비스를 받으면서 위안을 얻겠나. 어떻게 보면 참 한심한 일이다.
월화수목금 출근하는 곳에서 성취감과 만족을 얻을 수 없다면, 퇴근 이후와 주말에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서 그것들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그중 하나가 이 브런치일지도..) 언제부터인가 새해가 되어도 계획이나 목표 같은 건 세우지 않았는데, 지금 떠오른 이 생각이 어쩌면 목표가 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