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 들려온 음성
얼마 전, 살갗이 타들어 갈 듯 뜨거운 여름의 어느 오후였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자, 이제 찾는다!"
밖에서 숨바꼭질하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80~9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나 들을 법한, 지난 세기에 사멸한 줄 알았던 정겨운 문장이 귀에 꽂혔다. 새삼 옛 생각이 떠올라 반갑기도 하고, 그 무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에너지를 발산하는, 한낮의 태양보다 뜨거운 그들의 열정이 부러웠다.
전래 동요라고 해야 할까, 관용어구라고 해야 할까. 어릴 적 골목길에서 친구들과 놀면서 부르던 노래가 머릿속에 줄줄이 사탕처럼 딸려 나온다.
"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꼬마야, 꼬마야, 뒤를 돌아라,..."
어째서인지 이 노래들은 시작 음이 다 똑같다는 특징이 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도 마찬가지다.
어려서부터 달리기가 느렸던 나는, 술래잡기나 얼음땡 같은 술래가 있는 놀이가 너무 싫었다. 늘 시작하자마자 가장 먼저 잡히기 일쑤였고, 운이 나빠 내가 술래가 될 때면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그럼에도 여론이 그쪽으로 몰리면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했다. 아직 혼자 놀기는 싫은 어린이였기 때문이다. 주로 선호했던 놀이는 공기놀이나 땅따먹기, 고무줄 같이 그 자리에 앉아서 손으로만 하거나 일정 반경 내에서만 움직이면 되는 것들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집 앞 골목길에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해 질 녘까지 울려 퍼지곤 했다. 혼자 심심할 때는 그저 집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던 시절이었다. 3학년쯤 되자 또래 친구들이 하나둘 학원에 가거나 과외를 받기 시작해서 점점 골목길에서 아이들의 목소리는 듣기가 힘들어졌다.
어쩌면 밖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던 그 아이들이 아니라, 그들처럼 신나게 뛰어놀았던 유년 시절의 내가 부러운 것이 아닐까. 우렁찬 노래에 맞춰 허리까지 올라오는 고무줄을 뛰어넘고, 현란한 손놀림으로 공기 판을 장악하고, 비탈진 골목길에서 술래를 피해 나름 필사적으로 도망 다니던 그때의 내가. 잘하지도 못하는 뜀박질을 하다 툭하면 무릎이 까져서 엉엉 울며 집으로 들어가 버리던 기억마저도 이제는 몽글몽글하다. 그때 그 골목길을 지나던 어른들도 지금의 나처럼 우리를 부러워했을까. 그 어떤 것도 우리가 구축한 견고한 세계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듯한 결연한 자세로, 정말 최선을 다해서 놀던 시절이다.
요즘 글을 쓸 때면, 부쩍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자주 꺼내게 된다. 야속하게도 빠른 속도로 흘러가 버리는 세월이 아쉬워서일까,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서일까. 아니면 그저 나이가 들어서일까. 써놓고 보니 다 같은 말이다. 숨 가쁘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잠시 뒤를 돌아보는 것인가, 과거에 얽매여 나아가지 못하는 것인가. 뭐,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랴. 주기적으로 글을 쓰기 이전의 나는 스스로 이야깃거리가 별로 없다는 생각에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글감과 마감을 정하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엇이라도 끄집어내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정말 뭐라도 쓰게 되더라.
인생에서 특별한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나도, 지금의 나도 지극히 평범하고 무료하게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지나서 보면 매일 먹고, 놀고, 즐겼던 별것 아닌 일, 당연한 일, 시답잖은 일 모두가 추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