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의 추억

무심한 그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밤

by 메밀

아침 공기에서 부쩍 한기가 느껴진다. 긴 팔과 긴 바지를 꺼내 입었다. 그렇게 툭, 무심하게 가을이 왔다.


큰언니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작은언니와 방을 같이 써야 했다. 아주 옛날부터 우리는 라디오를 켜 놓고 자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다.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던 어느 날 밤에도 우리는 <유희열의 음악 도시>를 듣고 있었다. 청취자의 사연을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어느 취업 준비생의 넋두리였는데, 면접에서 당한 불쾌한 상황을 토로하고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스토리인데…….


나: 응?

언니: 에잇, 저게 왜 나와!


자기 사연이 소개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인지, 하필 나랑 있을 때 나와서 쪽팔렸던 것인지 언니는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작은언니는 95학번, 졸업과 동시에 IMF의 후폭풍을 정통으로 맞은 세대다. 그럼에도 선전하여 굴지의 대기업 최종 면접에까지 올라갔지만, 끝내 합격은 하지 못했다. (당시 많은 이가 그랬던 것처럼 울며 겨자 먹기로 대학원생의 길을 걷게 된다.) 화학을 전공한 그녀는 평생 화장이나 꾸미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면접을 보던 그날도 아마 기초화장만 하고 최대한 단정하게만 하고 갔을 것이다. 가뜩이나 보수적인 기업 분위기에 성 인지 감수성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대였기에, 면접관들 사이에 여자가 왜 꾸미지 않느냐는 뉘앙스로 은근히 기분 나쁜 언사가 오간 듯했다. 화장품이나 패션 업체였으면 또 몰라, 화학 기업이었는데 말이다. 언니는 그 울분에 북받쳐 키보드 워리어가 되어 라디오 게시판에 쏟아낸 것이다.


그러나 디제이 유는 따뜻한 위로의 말은 그다지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름 현실적인 조언을 조심스러우면서도 무심하게 전하며, 사은품으로 손목시계를 보내준다고 할 뿐이었다. (T세요?) 그 시계를 차는 것은 영영 보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유희열이 KBS로 옮겨 <라디오 천국>을 진행할 때였다. 내 신청곡이 무려 두 번이나 나왔다. 처음으로 게시판에 올린 신청곡은 무려 오프닝 곡으로 선정되었다. 별 사연은 아니었고, 어릴 적 인상 깊게 읽었던 알퐁스 도데의 단편 <황금 뇌를 가진 사나이>의 줄거리를 소개한 것이었다. 소설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김윤아의 <사랑,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마음의 사치>를 신청하며. 디제이 유는 사연의 첫 줄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바로 노래를 띄웠다. 당시에는 PC에 라디오도 듣고 실시간 채팅도 하는 ‘콩’이라는 프로그램이 깔려 있었다. 내 신청곡이 첫 곡으로 흐르자 ‘어우, 시작부터 이렇게 우울하고 좋은 노래가~’ 등의 찬사가 올라오는 것을 보며 괜스레 흐뭇해졌다. 두 번째에는 그냥 문자 메시지로 담백하게 듣고 싶은 노래만 적었다. 나탈리 임브룰리아의 <Torn>. 별것은 아니지만 내가 신청한 노래가 전파를 타고 전국에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했다.


가을바람처럼 선선하고 담백한 목소리의 무심한 그 디제이가 생각나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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