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자 운동(pendulation)

왔다 갔다하며 견딜만한 힘 비축하기

by 박초록

안타깝지만 센터에는 가정폭력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많이 내방한다. 피해 여성이 대부분이고 또한 자주 그 장면들이 아이들에게 노출된다. 오늘 만난 이 아이는 자다가 깨서 아닌 밤중에 아빠가 엄마를 흉기로 위협하고 때리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을까. 아이는 경찰이 안 왔더라면 죽었을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했다. 문제상황에 대한 대처능력과 정서조절능력이 어느 정도 발달한 성숙한 어른들도 이런 일이 노출되면 힘들 텐데 이 어린아이가 겪었을 감정적 무게가 얼마나 크고 힘들었을지 짐작이 되어 나도 눈물이 찔끔 났다.


트라우마 상담에서 이처럼 사건의 가장 위협적이고 결정적인 부분(핫스팟, hot spot)을 상담에서 다시 재직면하는 것은 그 자체로 힘든 일이 될 수 있다. 물론 상담실이라는 안전한 장소에 있고 상담자라는 나를 보호해 주고 도와줄 전문가가 같이 있기 때문에 문제 상황이 발생해도 대처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트라우마 상담에서는 항상 내담자의 실제적, 심리적 안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브루스 D. 페리)'라는 책에서도 상담에서 아이들이 감당할 수 있는 용량을 지키라고 말한다. 어떤 아이는 그게 1분일 수도 있고 5분일 수도 있고. 아직 심리적 역량이 덜 발달한 어린아이들일수록, 사건의 심각도가 클수록 그 용량은 적을 것이다. 이를 넘어가면 재외상화될 수 있다.


오늘 만난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으로 학업적 기능도, 사회적 능력도 뛰어난 학생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아이의 심리적 역량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이 아이는 그동안 아무에게도 아빠의 폭력으로 인해 힘들었던 마음을 터놓지 못했다. 그래서 엄마가 권하기 전부터 상담을 꼭 받고 싶었다고 했다. 사건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눈물이 뚝뚝 흘렀다. 뭔가 우리 가족에게 혹여나 피해가 갈까 친한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사건 당사자인 엄마에게는 더더욱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혼자서 끙끙 앓던 마음이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물어봐주자 봇물 터지듯 흘러나온 것이다. 이처럼 본인이 얘기하고 싶었다고 해도 혹여나 아이가 감정적으로 압도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진자 운동(pendulation)이다. 시계추가 왔다 갔다 하듯이 힘든 부분과 아이의 자원을 왔다 갔다 하며 조금씩 견딜만하게 해주는 것.


그동안 엄마아빠가 부부싸움을 할 때 힘들었던 마음을 얘기하다가, 그런 날에는 잠을 잘 못 자는데 다음날 피곤해도 학원을 가야 해서 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슨 학원을 다니는지, 그중에 좋아하는 건 뭔지 물어보니, 의외로 격투기장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토끼같이 순하고 착한 얼굴을 한 여자아이가 격투기를 몇 년째하고 있다니 순간 진심으로 반해버렸다(강한 여성에 대한 경외감이 있다!). 그래서 정말 멋지다 어떻게 그런 운동을 할 생각을 했냐 하면서 칭찬도 해주고 했더니 아이의 얼굴이 다시 순한 토끼가 되어 환하게 웃었다. 댄스학원도 다니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고 한다. 와 정말 운동신경도 좋고 몸으로 하는 활동을 좋아하는구나. 그거 스트레스 해소에도 정말 좋은데. 정말 대단해! 한참 운동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사건으로 돌아왔다. 아이의 힘든 사정은 4년 전부터 시작됐다. 아빠가 자주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물건을 던지고. 꼭 신체적 폭력이 아니어도 이러한 공포 분위기가 자주 조성되었던 것이다. 아이는 마음이 맞는 친구들이 많음에도 혹여나 집에 피해가 갈까, 누가 될까 말하면 안 될 것 같다고 했다. 아이는 교우관계가 참 좋았다. 4학년 때 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많이 만나서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고 만나서 떡볶이도 먹고 마라탕도 먹고 같이 게임도 하고 논다고 했다. 귀여운 이 친구와 비슷한 아이들이 모여서 떡볶이랑 마라탕을 사 먹는 장면을 상상하니 너무 귀여워 웃음이 났다. 00이와 비슷한 친구들일 것 같아. 했더니 맞다고 활발하고 재밌는 친구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또 토끼 같은 웃음^^ 아이는 조금씩 상담실 환경도 익숙해지고 내가 편해졌는지 사건의 가장 힘들었던 부분, 직접 목격한 장면들을 이야기했다. 너무 무섭고 두렵고 긴장되었다고. 자기감정도 참 잘 인식하고 표현하는 아이였다. 이렇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감정을 이름 붙여 말하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상담자가 그 마음을 타당화해 주고 정말 그랬겠다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마음이 놓였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얘기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상담 말미에 말해주었다. 이 같이 힘든 부분과 자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미세하게 내담자의 몸과 심리상태를 살피는 세심한 작업이 트라우마 상담에는 필요하다.


어른의 경우라도, 그리고 꼭 상담 장면이 아니라도 이렇게 내가 가진 상처, 못나 보이는 부분, 혹은 실수들로 인해 괴로운 마음이 들 때 내가 가진 자원, 강점과의 사이를 왔다 갔다 통합하며 조금은 더 견딜만한 힘을 비축하면 다시 한번 발을 구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 같다. 우리 집 둘째는 내가 출근하기 전, 어린이집에서 헤어지기 전, 혹은 교회에서 떨어져서 자기 예배당으로 혼자 들어가야 할 때처럼 나와 헤어질 때 나를 꼭 한번 안고 들어간다. 나름대로 오늘 하루동안, 혹은 몇 시간 동안 혼자서 견딜만한 힘을 충전하는 것 같다. 물론 나도 충전이 되고! 나에게 에너지를 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충전기를 꽂아보자. 나는 요즘 퇴근 후 가족들과 함께하는 저녁식사 시간이 제일 좋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메뉴는 뭘 먹을지 고민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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