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여행이 나에게 주는 의미

by 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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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그커피가 알려준 여행의 의미]

"하노이에 아주 멋진 카페가 있어요. 오늘 거기서 커피 한 잔 하면서 시작해요."

멋진 카페라고 해서 살짝 기대를 했건만 10평 남짓한 아주 작고 남루한 카페였다. 가뜩이나 엄청 작은 카페인데 코딱지만한 테이블과 의자에 낯선 사람들과 옹기종기 함께 앉아야 했다. 게다가 에어컨도 없고, 통풍을 위해 열어놓은 창문으로는 하노이의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가열된 열풍이 들어와서 그야말로 끔찍한 카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크게 개의치 않으면서 서로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홀짝거렸다.

"이게 에그커피라는 거에요. 정말 맛있어요. 들어봐요."

그녀는 원두를 내린 것 같은 커피 위에 갑자기 날 계란 하나를 툭 풀어넣었다. 문화충격이었다. 커피와 계란의 조합이라니... 맛이 이상할 거 같아서 선뜻 마시기가 꺼려졌다. 하지만 잘 젓고나니 까만 원두커피는 마치 카푸치노와 같은 모양새를 보였다. 마셔보니 왠걸... 이런 매력적인 맛이라니! 계란의 비린 맛이 전혀 나지 않으면서 쓴 맛의 커피 원두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어 마치 우유를 넣은 것보다 훨씬 더 담백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에그커피는 하노이의 명물이라는데 나는 전혀 그 사실을 몰랐다. 아니 알았다고 하더라도, 굳이 찾아가서 마시지는 않았을 거다. 하루에 베트남 쌀국수도 겨우 한 그릇 먹을 돈 밖에 없는 판에 커피까지 찾아 마실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추천해주고 대접해준 것이 아니었다면 알았다고 하더라도 먹지 않았을 거다.

비록 커피 한 잔이었지만 나에게 다가오는 의미는 남달랐다. 맛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바글바글 거리는 이색적인 카페에서 마신 커피라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단지 사진을 찍으러 온 나를 길거리에서 누군가가 알아봐주고, 황금같은 주말에 잘 알지도 못하는 외국 여행객을 위해서 시간을 내 준 현지 베트남 친구가 사준 커피였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타인이 정해둔 '꼭 가봐야 할 것들' 이나 '꼭 해야할 것들' 과 같은 것들에 목 매여 살 때가 많다. 남들이 가본 곳을 가야, 남들이 해본 것을 해야 자기도 그 대열에 합류한 것 같다고 생각해서일까. 하지만 내 스스로에게 분명한 동기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들을 많이 봐도 내 안에 온전히 흡수 되지 못했다. 설사 흡수 되었다 한들, 내 안에서 잘못된 편견으로 자리 잡을 때가 많았다. 그것들이 결국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었고 행복하지 못하게 해왔다.

그녀가 사 준 커피가 하노이를 잊지 못하게 할 만큼 맛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커피와 함께 담겼던 그 순간과 이야기가 나에게 좋은 추억이 되었다. 자신만의 이유가 없다면 '꼭 해야한다' 라는 생각은 우리에게 큰 해가 될 때가 많다. 그녀와 함께 나눈 커피 한 잔은 맛과 장소를 떠나서 하노이에서 처음으로 누군가와 소통을 하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나에게 주는 의미는 그 어떤 것보다도 컸다. 꼭 마셔봐야 되는 하노이 명물 커피라서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적절한 타이밍에 좋은 사람에게 대접받은 커피라서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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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끼엠 호수에서 있었던 일]

25년간 공부만 했다는 그녀는 자신의 말대로 정말 학구적인 이미지가 강한 여성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사진을 이렇게 찍어주는 것은 처음이라며 어색해 했지만 처음으로 느껴보는 기분이라서 그런지 그 시간들을 매우 즐기는 듯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화시간이 길어질 수록 그녀의 얼굴은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사진을 참 좋아하는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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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끼엠 호수에서 사진을 찍다가 갑자기 저 멀리에서 모델포스가 물씬 느껴지는 한 현지 여성이 있었다. 밀로타오는 갑자기 그 여성을 보다가 나를 보면서 무지 상기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폴, 저 여성 한 번 찍어보는 건 어때요? 내가 가서 한 번 물어볼게요!"

나는 괜찮다며 손사레를 쳤지만, 밀로타오는 자기가 어떻게든 해보겠다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베트남 말로 뭐라고 몇 마디를 주고 받더니 그녀는 나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와 어눌한 영어로 자기를 찍으라며 손짓을 했다. 그녀는 마치 모델처럼 포즈를 취했고 손가락 하나하나 디테일도 정말 자연스러웠다.

한 20분정도 촬영을 해주고 나중에 사진을 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하며 페이스북 아이디를 서로 주고 받은 후 헤어졌다. 촬영이 끝난 뒤 그녀에게 물었다.

"저 분 도대체 뭐하는 분이에요? 뭐라고 이야기 한거에요?"

"저 여자분 속옷 모델이래요. 예전에 모델경연대회에서 준우승을 하기도 했다네요."

"헐, 그러면 나 지금 란제리 모델을 촬영한거야? 이런 모델을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길거리에서 만나고 또 사진까지 찍다니..."

어제까지만 해도 6시간동안 호암끼엠 호수를 돌아다니며 촬영할 모델들을 찾았으나 헛탕만 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녀가 도와준 덕분에 같은 장소에서 전혀 다른 결과를 맞이했다.

"아... 그냥 무턱대고 다가가기만 하는 것은 아무리 열심히 한 들 소용이 없구나."

이번 경험을 계기로 앞으로는 무턱대고 사람들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다가가지 않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처음보는 사람들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것이 결코 호의가 아니었음을, 오히려 그들에게 불편한 감정만 실어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는 시간이었다.

무작정 열심히 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사진을 열심히 찍는 것보다, 사진을 잘 찍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나에게 느끼는 감정과 생각이다. 나는 어제 우연히 밀로타오 가족을 만났고, 그들에게 나누었던 사진이 밀로타오의 마음을 움직였다. 다음 날 그녀와 예상치 못한 약속을 잡게 됐으며, 그러다보니 란제리 모델까지 촬영하게 되는 행운을 만났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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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외곽으로 여행]

하노이 외곽에 아주 특별한 곳이 있다며 그년는 나를 그 곳으로 안내했다. 오토바이로 약 30분 정도 떨어진 그곳은 우리나라로 치면 인사동 같은 곳으로 베트남의 전통적 굿즈들을 판매하는 거리였다.

"보통 관광객들은 이곳을 잘 몰라요. 그래서 데리고 와보고 싶었어요."

그녀는 이곳에서 공예체험을 해볼 수 있다며 나를 도자기 공방으로 이끌었다. 자기가 비용을 다 지불할테니 꼭 체험해보라며 말하는 바람에 거절하기에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러겠다고 응했다. 사실 나는 도자기를 만드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다. 하지만 이전에 에그커피 때와 마찬가지로, 맛있는 커피라서 의미있는 것이 아닌, 그 커피를 시작으로 많은 일들이 의미를 지녔던 것처럼 이번 공방체험도 나에게 특별한 체험이 되었다.

하노이를 여행하면서 공방을 체험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그녀가 나를 생각해주고 이런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덕분에 하노이에서 추억이 훨씬 더 값지고 깊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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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용기가 부러워요.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뛰쳐나갈 돈은 있지만, 이제는 용기가 나질 않네요."

그녀와 하루종일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그녀가 왜 의사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는지에 대해서 들었다. 원하는 삶이 있었지만, 가족들과 자신의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의사로서의 삶, 누군가에게는 부러울 수 있는 직업이지만, 정작 개인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신 같은 사람들을 보면 약간 기분이 좋아져요. 나 대신 누군가가 아바타처럼 그 일을 하고 있는 기분이랄까?"

그녀는 너무나도 고맙다며 이번 여행의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져 주었다. 내가 스스로 돈을 내서 밥을 사먹거나 음료수를 사먹으려고 했을 때도 그녀는 손사레를 치며 이렇게 말했다.

"폴, 당신은 저에게 아주 소중했던 가족과의 여행에 사진을 남겨 주셨자나요. 제가 더 받은 게 많아요."

누군가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을 때, 내가 받는 것들도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았다. 주기만 해도 안 됐고, 무작정 받기만 해도 안 되었다. 누군가의 삶을 먼저 아름답게 만들어줄 수 있을 때, 상대방 또한 사심없이 나를 도와주었다. 그러한 도움들은 거절해야하는 것이 아닌 감사히 받아야 하는 것들이었다. 만일 거절하게 된다면, 그것은 상대방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이 되니 또 하나의 예의 없는 행동이 될 수 있었다. 잘 주고 잘 받아야 했다. 그녀를 통해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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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마감하며 그녀는 자신의 오피스를 구경시켜주겠다며 오피스로 나를 데려갔다. 특별할 것 없는 일반 사무실이었지만, 이 친구 덕분에 세계보건기구 베트남 지사 사무실도 와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여행이 주는 의미를 딱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어디를 가는가와는 상관이 없다고 느껴졌다. 의미없이 바라보는 아름다운 호암끼엠 호수의 야경보다는 의미있는 누군가와 나누는 사소한 커피 한 잔이 나의 여행에 있어 더 큰 의미와 행복을 주었던 것 처럼.

그녀와 함께 했던 여행을 통해서 더욱 더 큰 확신을 갖게 됐다. 앞으로도 남들이 세워놓은 기준이 아무리 멋져보일 지라도, 내 스스로가 느끼는 동기부여 없이는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 많은 곳을 가지 못하더라도, 더 멋진 풍경을 보지 못해도 좋으니까 정말 나를 찾는 여행을 해보자고.

앞으로 만남과 이야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가 많이 된다.

사진 / 글 폴작
작가블로그 walking-studio.com
작가인스타 @walking_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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