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방콕을 떠나다]
드디어 블랙홀 같은 방콕을 떠나 북쪽 산악도시 치앙마이로 떠난다. 태국 방콕에 온 지 거의 한 달만이다. 병수삼촌 댁이 한국처럼 너무 편했다. 가지고 있던 여행자금으로도 충분히 2달을 버티고 남았는데, 용돈까지 넉넉하게 주셔서 별로 쓸 일이 없었다. 게다가 차도 빌려주셔서 방콕 근교까지도 특별하게 큰 돈 들이지 않고 편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게다가 외식도 자주 나가고, 내가 좋아하는 사우나와 마사지숍도 얼마나 많이 데리고 가셨는지 떠나기 힘든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더 이상 지체되면 방콕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아 치앙마이로 가는 버스 티켓을 샀다. 이마저도 삼촌께서 알아봐 주시고 구매를 해주셨다. 비행기 타고 가라는 걸, 버스로도 충분하다고 애써 말하긴 했지만, 편안한 생활에 중독이 됐는지, 그마저도 아쉽게 느껴지더라는. 참 사람 마음이라는 게 이렇게 간사했다.
한 달 동안 방콕에서 여행자가 아닌 현지 주민처럼 살아가다 보니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잠시 잊고 지냈던 것 같다. 치앙마이를 가는 버스 안에서도 장기 여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치앙마이로 단기 휴가를 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매일 이동할 때도 가장 저렴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교통수단을 이용해왔는데, 오늘 내가 탄 버스는 마치 비행기에 탑승한 느낌이 들 정도로 아주 럭셔리한 버스였다. 1인당 물 한 병씩 제공할 뿐만 아니라, 배고플 때 먹으라고 샌드위치와 몇 가지 간식거리도 제공했다.
시간은 약 10시간 정도 소요됐다. 이전 같았으면 지옥과 같은 시간이었을 텐데, 버스가 워낙 좋다 보니 정말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깜깜한 밤 시간에 이동하는 버스라 태국 시골의 전원적 풍경을 즐길 수는 없었다. 의자를 뒤로 재끼고 앞으로 새롭게 시작될 태국 북부지역 여행에 설레는 마음을 안고 잠이 들었다.
[여기는 도시인가, 시골인가]
새벽의 여명을 여는 동시에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후덥지근한 태국의 날씨이지만, 치앙마이의 아침 기온은 서늘하고 건조했다. 확실히 산악지역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역이라 남쪽과는 기온이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다. 도시에 도착한 순간, 그리 큰 도시는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서울에 살다가 강원도 작은 군락 마을에 온 느낌이랄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쏭테우 라고 불리는 대중교통 드라이버들이 호객행위를 하러 달려든다. 여느 때와 상관없이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쳐 버렸다.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나에게서 여행의 고수의 품격이 느껴졌는지, 100바트를 부르던 이들의 가격이 단번에 내려간다. "20바트!!"
쏭테우를 타고 숙소 도착해 먼저 짐을 내려놨다.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전원주택 형식의 게스트 하우스였다. 큰 길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참 조용하고 아늑한 곳이었다. 주인집 아저씨가 화단 관리에도 신경을 쓰시는지 마치 숲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슬슬 마실을 나가려던 참에, 주인아저씨가 자전거도 무료로 빌려 준다며 타고 가라고 하셨다. 하지만 3개밖에 없으니 너무 오래는 타고 다니지 말고 주변에 잠시 어딘가를 다녀올 때만 이용하라는 귀띔도 잊지 않으셨다.
치앙마이는 참 시끄러우면서도 조용한 동네였다. 분명 도시는 도시인데, 이상하게 말로 설명하기 힘든 차분함이 도시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기분이 드는 묘한 도시였다. 어딜 가도 시끄러운데, 어딜 가도 조용한 곳이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극과 극을 체험할 수 있는 이색적인 도시였다.
치앙마이에서는 아무런 일정을 세워두지 않았다. 그냥 마음이 이끌리는 만큼 있어보기로 했다. 비록 방콕에서 특별한 것을 하지 않으면서 보내긴 했지만, 도시 그 자체가 주는 마음의 분주함이 있어서 그런지 늘 마음이 분주했다. 여행자금도 여유가 있고, 일정에 쫓겨 다니는 여행자도 아니니, 그동안 못 했던 것들을 하면서 지내는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치앙마이에서 또 한 번의 주민생활을 시작했다.
[목적을 위한 목표 버리기, 이유 있는 한량생활]
정말 격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왜냐하면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싶기 때문이다.
치앙마이에서 지내는 동안 입에 늘 달고 다니던 말이다. 물론 정말 아무것도 안한 것은 아니다. 단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떤 목표의식을 갖고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치앙마이는 정말 아무 목표의식을 갖지 않고 3주라는 시간을 지내기에 최적의 도시였다. 방콕이 낙원이라면 치앙마이는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책이 읽고 싶으면 책을 읽었고, 기타가 치고 싶으면 기타를 쳤으며, 잠을 자고 싶으면 잠을 잤다. 늘 무언가를 하고 있었지만, 과도한 목표의식만 쏙 뺐다. 목적 자체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세세한 목표를 두지 않았을 뿐이다. 꼭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싶지 않았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흐름에 맡겨 살아보고 싶었다.
여행 초기에는 꼭 무언가 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특히 힘들게 돈을 벌어서 나온 여행자들이나, 시간에 쫓겨 다니는 여행자들에게서 종종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무언가 많이 보고 느끼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런 특별한 이유 없이 많이 보고 느끼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면 사실 소모성 여행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목적이 서로 다를 수는 있지만 뭔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떠나온 것은 매한가지일 텐데, 이러한 경우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방식으로 여행을 끌고 가게 된다.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우리가 순간적으로 갖고 있던 목표의식이 실제 우리가 추구하는 본질적 목적과 맞지 않을 때 일어난다. 목표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순수 목적을 잃어버리고 목표 자체에 욕심이 들어가 버리면 자신도 모르게 본질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이럴 때일수록 본질적인 목적이라는 '방향' 그 자체는 잊지 않고 있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하고 싶은 것만 해보는 것도 스트레스 같은 답답함을 해소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하나의 고백이지만, 감사하게도 나는 어린 시절 방황을 할 때에도 늘 돌아갈 곳, 내가 가고 싶거나 가야 하는 곳에 향한 시선은 늘 놓치지 않았다. 가출을 하더라도 늘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단지 그 사이에 딴짓을 하면서 그동안 치석같이 촘촘히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마음에 쌓인 응어리가 마시멜로처럼 다시 말랑말랑해져 나의 목적의 본질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상태가 되곤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의 목적은 행복이다. 그 목적까지 이르는 도구가 서로 다를 뿐, 모두가 행복을 향해 달려간다. 때로는 그러한 행복 추구가 변질되어서 타인의 삶을 침해하기까지 이르기도 하지만, 그 조차도 자신들이 행복해지고 싶어서 할 때가 많다. 돈을 버는 목적도, 권력을 탐하는 이유도, 진실 앞에 거짓말을 하는 이유도 다 자기가 그러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모두 행복에 대한 오해와 착각일 때가 많다.
아무리 개인적인 행복이 좋아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결코 행복이 될 수 없다. 그저 자신만 좋은 쾌락이 불과할 뿐이다. 그렇게까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과도한 목표의식을 잠시 내려놓고 딴짓을 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한 딴짓들은 나의 욕심을 순화시키기 위해서 꼭 필요한 행동이었다. 기존 목표에 있던 나의 욕심이 빠져나가면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분명히 구분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깔끔한 선택과 동시에 강도 있게 집중할 수 있었고 다시 나의 목적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됐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으면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때가 되면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때 그 일을 하면 된다. 하다가 또 재미가 없으면, 잠시 내려놓고 다른 곳에 시선을 두어도 괜찮다.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만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면, 잠시 다른 곳을 다녀오는 것이 우리 삶을 크게 침해하지 않는다. 치앙마이와 빠이라는 곳에서 3주를 그렇게 보냈다. 나는 덕분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서 평소 목표의식을 갖고 살았을 때보다 훨씬 더 평안한 시간을 보내면서, 앞으로 여행에 실질적으로 크게 도움이 됐던 수많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다.
나의 여행의 목적은 '가장 나다움 모습을 발견하는 것' 이었다. 결코 치앙마이의 수많은 명승고적을 탐방하고 액티비티를 즐기는 것 자체가 아니었다. 그것들이 목적이 이르기 위한 유용한 목표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내 안에 내적 이유가 분명히 세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시도만 하는 것은 오히려 나의 본질적 목적과 상반된 길을 가는 것에 불과했다. 감사하게도 그 기본적인 방향성을 잃지 않음으로써 불필요한 곳에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었다.
사진 / 글 폴작
작가블로그 walking-studi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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